2016년 12월 6일 화요일

[인터뷰] 이랑 (2부) - 2016-12-06

이랑: 헬조선을 살아가는 이랑의 세계 (2부) BY 김종규 - 2016-12-06

*원문 링크: http://webzinem.co.kr/5648


이랑 2016년 9월 21일 ©jongkyukim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 

위 질문은 이랑의 곡 ‘신의 놀이’의 도입 가사다. 올해 들어 국내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부쩍 ‘신의 놀이’가 귀에 맴돈다. 한국에서 산다는 것이 마치 신의 장난스런 놀이처럼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게 된 탓일까. 

이랑은 참 다재다능하다. 그는 2012년 맥북 한 대로 녹음해서 만든 데뷔 앨범 [욘욘슨]을 발표하며 세상에 알려진 뮤지션이다. 만화가로서 <이랑 네컷 만화>, <내가 30대가 됐다>를 발표했고, 영화감독으로서 <유도리>, <변해야 한다> 등을 만들었으며, 최근에는 웹드라마 <출출한 여자>, <게임회사 여직원들>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다. 

올해 이랑은 음악가로서 바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6월에 발매된 정규 2집 [신의 놀이]는 신곡 10곡이 수록된 앨범으로 책과 음악 다운로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솔직하게 쓰여진 글과 더불어 있는 그대로를 노래하는 그의 노래는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의 음악팬들에게까지 큰 울림을 선사하고 있는 중이다. 또,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관객 앞에서 매번 다른 음악가와 즉석에서 곡을 만들었던 공연 <신곡의 방>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공개되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이랑이라는 ‘사람’이 무척 궁금했다. 지난 9월 21일 망원동 작업실에서 이랑을 만날 수 있었다. 1부에서는 음악가 이랑의 활동을 중심으로 다루고, 2부에서는 영화감독 이랑과 그 이외의 면면을 다루기로 한다. 





“영상을 만드는 이랑” 

Q: ‘신의 놀이’ 뮤직비디오를 제작 중이라고 들었다. 
이랑: 2년 정도 전부터 사전작업을 시작했다. 이 얘기는 지금 쓰고 있는 에세이집에 아마 실릴텐데… 22살 때, 그러니까 9년 전에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의 기억이 바탕이 되었다. 그때 좁은 주방에서 낮 11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을 했다. 냉장고를 열고 뒤에 있는 오븐을 열고 피자를 만들고… 그런 일을 계속 하다가 어느 순간 반복되는 동작의 무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로 어떤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서 카메라를 들고 영상을 찍곤 했다.
이번 [신의 놀이] 앨범 작업하면서 ‘평범한 사람’ 같은 곡이라든가… 그런 개별 인간들에 대한 관심이 들어간 곡들이 만들어지고 지난 생각들이 계속 디벨럽(develop)되었다. ‘나는 이런 춤을 추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일하면서 무슨 춤을 추나. 그런 것을 수집을 하자.’ 그렇게해서 시간 날 때마다 주변에 있는 다른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평소 일을 하면서 반복적으로 하는 동작을 도구 없이 마임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배틀을 잡거나, 빵을 만들고, 요리하는 모습… 과학자, 의사, 한복 디자이너, 여자, 남자를 만나면서 동작을 모았다.
그리고 작년에 쌀쌀할 때, 지난 뮤직비디오 ‘프로펠러’ 때 같이 안무를 짰던 친구와 그 동작들을 분석하면서 춤으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이번 앨범의 뮤직비디오를 ‘나는 왜 알아요’로 정하려고 했다. 내 생각에 ‘프로펠러’와 같은 네 박자고 춤으로 메시지를 넣기에도 잘 맞는 것 같았으니까. 근데 이번에는 세 박자로 해보고 싶다는 의견이 있었고, 마침 ‘신의 놀이’가 쿵짝짝 하는 왈츠 박자라서 좀 어렵지만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하길래 그걸로 결정했다. 안무 작업은 ‘프로펠러’ 때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랑 시간을 갖고 연습하고 해서 너무 재미있었다. 촬영은 끝났고 조금씩 편집하면서 만들고 있다. 11월 중에 나오지 않을까. (11월 10일 공개되었다) 

Q: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랑 씨는 일을 리드하는 스타일인 것 같다.
이랑: 17살 때부터 일을 했다. 잡지 페이퍼에서. 그때는 항상 애기고 어디서든 막내였다. 회사에 들어가면 언니들이나 현역을 제대한 오빠들이 많아서 그분들이 밥을 사줬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보고 다 언니라고 그러고 누나라고 그러고 있더라. 이제는 감독님이라고 부르고. (웃음)
이번에 밴드를 할 때도 어떻게 하지… 이러다가, ‘어차피 다 동생이고 이제 난 막내가 아니야, 나는 어른이야, 여기서는 리더야, 이떻게든 해보자’ 했더니 일이 잘 진행되고 편하더라. (웃음) 뮤직비디오 작업하며 무용수들이랑 같이 할 때도 고민하면서 시간을 끄느니 그냥 리드 해버리니까 훨씬 손쉬웠다. 특히나 이건 내 작업을 위해서 하는 거니까. 영상 작업 때는 스탭들 중에서도 어린 편인데 내가 결정을 해야했다. 역시 리드해보니 순탄하게 잘 진행이 되고 재미있었다.
어떤 때는 그런 점이 엄청 피곤하다. 왜 나는 항상 뭘 하자는 사람인가. 왜 내가 먼저 하자고 안 하면 아무도 안 하고 아무도 먼저 연락을 안 하고… 왜 그럴까? 그래서 피곤했을 때가 잠깐 있었다. 근데 그건 어차피 잠깐이고 나머지 시간에는 내가 다 연락해서 보자고 한다. 가끔은 나도 누가 먼저 연락해주고 끌어주었으면 할 때가 많이 있다. “이거 어때요?” 라고 누가 물어 봤으면… 근데 다시 생각해보면 어차피 다 내 작업인데 내가 안 하면 누가 해, 가 되는 거다. 

Q: 이랑 씨는 음악을 만들고 영상도 만든다. 둘 사이의 차이점이 있을까?
이랑: 나는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뭐든지. 혼자서 음악을 만드는 것처럼 영상도 처음에는 시나리오를 혼자 쓴다. 결국 시작할 때부터 혼자 작업하는 것은 똑같다. 이후부터 사람들이 많이 투입이 되는 것인데 되게 재미있다. 사람이 한 공간에 많이 모이면 그만큼 생기는 에너지도 많지 않은가. 콘서트를 크게 하는 뮤지션들이 엄청나게 많은 관중 앞에서 공연하는 것을 되게 좋아하는게 그래서인 거고. 그런 무대에 대한 부담감도 장난 아니지만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서 오는 반응을 즐기다 보니 무대의 맛을 못 잊는 것 같다. 그런 종류의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일이 끝나고 집에 오면 외롭고.
영상 작업은 공연이 아니다보니 사람들하고 얘기하고 지시하고 만들어 가면서… 진행될 수록 눈에 보이는 게 있는데 그런 것이 재미있다. 공동으로 하다보니 역할극하는 기분도 든다. 그러다 보니 예상치 못한 일도 많이 생긴다. 빨리 찍어야 하는데 누가 아프다던지, 지진이 났다던지, 누가 화가 났다던지, 누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던지, 하는 그런 변수들이 엄청 많다. 그때마다 빠르게 판단을 하고 다같이 상황을 바꿔 나가다 보면 에너지가 생긴다. 내가 잘하는 게 판단을 잘 하는 거다. (웃음) 




Q: 최근 공개된 <집단과 지성>의 예고편도 그렇고, 예전에 감독 연출한 <변해야 한다>, <유도리>, <주 예수와 함께> 등과 같은 작품들이 흥미롭다. 이랑만의 유머코드가 들어간 점이라던가, 지인들이 나온다던가. 작품끼리 어떤 연결점도 있는 것 같다.
이랑: 살아있으니까 자꾸 재미있는 생각이 나는데 계속 하고 싶고 만들고 싶다. 만드는 중에 제작비가 떨어지기도 하고, 투자를 받아서 상업물을 만들기도 하고… 그렇게 또 친구들하고도 이것저것 한다. <집단과 지성>은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영상 편집이 불가능해서 1년 동안 고생하며 이거저거 해보다가 지금 약간 해탈한 상태로 예고편만 작업하고 있다. 

Q: <집단과 지성>은 예고편만 공개된 상태인데 어떤 기술적인 문제가 생겼는가?
이랑: 찍는 도중에 슬레이트를 안 쳐서 영상의 녹음과 비디오가 맞지 않는다. 슬레이트를 안 치면 영상과 사운드 파일을 붙이는 부분이 지점이 안 생겨서 붙이기 어렵다. 영상파일이 한 트랙, 오디오 한 트랙만 있으면 붙일 수 있는데… 문제는 카메라를 3, 4대로 찍고 그래서, 그걸 다 찾아야 한다. 전체를 모으면 파일만 몇 백개가 되다보니 전문 편집기사를 찾아가도 어렵다더라. 그들도 한달 이상 노가다를 뛰어야 붙는다고 하고.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다.
일단 예고편에 쓸 것은 찾아서 그 부분만 소리를 찾으면 되니까 어떻게든 새로운 형태의 결과물을 생각 중이다. 이대로는 아무래도 본편이 나오기는 힘들어서 예고편 + 시나리오집 + 추가 정도의 구성으로 된 결과물을 생각하고 있다. 본편을 제외한 주변 구성만으로 사람들이 각자의 머릿속에서 본편을 만들 수 있게 하는 방식을 시도하려고 한다. 아예 결과물을 안 내는 것은 내 성질에 못 참는다. 어떻게든 완성을 하고 싶다. 

Q: 이랑 씨의 영상 작업에 영향을 준 인물은?
이랑: 기타노 다케시(Kitano Takeshi), 토드 솔론즈(Todd Solondz ), 래리 데이비드(Larry David)라는 미국 작가 겸 연출가이자 배우인 사람을 좋아하고, 루이스 씨케이(Louis C.K.), 우디 앨런(Woody Allen)도 좋아한다. <스튜디오 60>와 <웨스트 윙> 작가이자 영화 <소셜네트워크>의 각본가 아론 소킨(Aaron Sorkin)도 되게 좋아한다.
항상 작업할 때는 토드 솔론즈, 래리 데이비드, 루이스 씨케이 같은 풍으로 하고 싶다. 작가 본인이 출연해서 본인이 하고 싶어 하는대로 이야기를 풀고 하는 식이다 보니까 마음에 든다. 우디 앨런과 아론 소킨의 경우는 좀 더 고급 기술이 필요할 것 같다. 이창동 선생님의 경우는 그냥 겁나 리스펙트하고 있다. 하지만 선생님처럼은 내가 죽었다 깨도 못할 것 같다.

Q: 앞으로 이랑 씨 본인이 영상 작업에 직접 출연할 수 있을까?
이랑: 학교 다닐 때는 많이 했었다. 지금도 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포기해야 하는게 많다. 일단 카메라 뒤에 못 있으니깐 놓치게 되는게 너무 많아서 먼저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이번에 <집단과 지성>에 출연하면서 놓친 게 많다. 실수도 그렇고. 배우로 출연하면 감독으로서의 컨트롤을 할 수가 없으니까,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면서 관리해줄 수 있는 동료가 더 필요한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나도 여유가 생겨서 배우로 출연하면서 감독 역할도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Q: 예전에 했던 인터뷰 중에 “노래는 일기와 자기 치유에 가깝고 영화는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미래다”는 언급을 했었다. 지금은 음악과 영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이랑: 음악은 진짜 하고 싶을 때만 하고 안하고 싶을 때는 아예 안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야기를 짜는 것은 항상 하고 싶으니까, 그러다보면 더 하고 싶을 때가 있는 거라서, 나중에 어떤 노래를 만들 수도 있고 부르고 싶을 때가 생기겠지. 그런데 영화는 계속 하고 싶다. 이대로 40대가 된다고 했을 때 영화로는 하고 싶은 이야기나 만들고 싶은 장면 같은 것이 계속 떠오른다. 내가 구성한 이야기를, 그 세계를 시각 뿐만 아니라 청각 등 모든 감각들을 집결시켜 보여줄 수 있으니까. 반면 음악은 주로 청각에 의존하다보니 듣는 사람 각자가 떠올리는 이미지가 다르지 않은가. 내가 의도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영화와 각자의 감성에 젖게 할 수 있는 음악. 그 두가지를 종합하고 싶은데 어렵다. 




“말에 힘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Q: 원래 음악을 많이 듣지 않는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런가?
이랑: 음악을 누가 틀어주면 듣지만 스스로는 거의 안 듣는 편이다. 이동할 때 조금 기운이 떨어지면 멜론 같은 스트리밍으로 활기찬 아이돌 음악 같은 것은 듣는다. 최신 랭킹 1위부터 끝까지 다 듣고… 그치만 가지고 있는 음악은 거의 없다. 태양이랑 지드래곤이랑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라든가, 일본 친구들이 준 음악 몇 개 정도가 다고… 그것만 몇 년째 듣고 있다.
음악보다는 미국 스탠드업 코메디 음성 파일을 계속 듣는다. 좋아하는 코메디언의 음성 파일을 반복해가면서 듣고 길을 가면서도 듣는다. 되게 좋다. 미국의 코메디는 한국하고는 많이 다른데. 스탠드업은 코메디언 본인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자신의 생각이 들어간, 유머러스하게 포장해서 말하는 거라… 코메디언 본인의 인성에 따라 되게 차이가 많이 난다.
예를 들어서 티그 노타로(Tig Notaro)라고 하는 여자 코메디언은 유방암에 걸렸는데 절개 수술을 해서 양쪽 가슴이 없고 젖꼭지도 없다. 아예 아무 것도 없다. 아무튼 암에 걸렸다니까 갑자기 거의 만나지도 않았던 아빠와 오빠가 찾아온다. 근데 유방암이니 겉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만나러 와도 그냥 쇼파에 앉아 있을 뿐 아무 것도 해줄 수 있는게 없었다더라. (웃음) 또, 더이상 친구들이 스몰토크(small talk)를 안 한다고도 했다. 자기는 그 전과 똑같고 단지 암만 생긴 것 뿐인데 친구들은 “나 오늘 회사에서… 아, 아니야.” 라고 혼자서 화제를 정리하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아니야, 너는 암 걸렸잖아.” 라고 한다고. (웃음)
그런 식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반복해서 듣는다. 들으면서 다른 일을 할 수 있고… 책을 읽다보면 작가와 대화하는 느낌이 들지 않은가. 이 사람과 나와는 비슷하다, 같은. 스탠드업을 듣고 있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든다. 

Q: 언제부터 스탠드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나? 
이랑: 모르겠다. 스탠드업이란 장르를 알게 되면서부터 인 것 같은데… 아까 말한 래리 데이비드 같은 경우에 <사인펠드>라는 시트콤을 만들었다. 제리 사인펠드(Jerry Seinfeld)라는 스탠드업 코메디언이 본인으로 출연하는 시트콤인데 <프렌즈>가 나오기도 전이다. 그 시트콤은 시작과 끝에 항상 제인 사인펠드가 스탠드업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중간에는 그 스토리와 관련이 있는 시츄에이션 코메디가 나오고… 본인과 친구들이 겪은 일들이 <프렌즈>처럼 지나간다. 루이스 씨케이도 자기 드라마에 본인이 직접 짠 스탠드업을 넣는다.
미국은 코메디의 기본이 스탠드업이어서 거기서 많은 얘기를 푼다. 그러다 나중에 유명해지면 작가가 된다던지 연출가, 각본가, 배우가 되는 식이다. 이 사람들이 하는 스탠드업과 그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드라마, 영화, 시트콤 같은 게 다 연결 되어 있고 뻗어 나가다보니… 스탠드업을 계속 듣는 것만으로도 그 작가들에 대한 파악이 잘 된다.
처음에는 나도 이런 장르가 있는 줄 몰랐는데 미국 드라마를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 <투나잇쇼> 같은 토크쇼에서는 쇼 중간에 음악프로처럼 밴드를 소개하기도 하고 스탠드업도 나온다. 그런 쇼의 코너답게 새로 유명해지는 사람이 짧게 몇 분 정도 자기를 보여준다. 와, 이런 장르가 있구나… 그렇게 알게 되면서 좋아하는 사람을 계속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는 코메디언 두명이 말하는 것 위주로 하는 만담이란 장르가 있는데 그런 것도 재미있어서 찾아보기도 하고. 이런 것들은 우리나라에 없는 장르니까 재미있다. 




Q: 스탠드업이 다른 작업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가?
이랑: 9월에 김중혁 작가님의 신작 발간 행사*에 짧게나마 스탠드업을 하려고 한다. 그 책의 주인공이 스탠드업 코메디언으로 나오는 것도 있고 내가 좋아한다고 말도 많이 했기 때문에 하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뭐든 내 의도가 다 전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멜로디나 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도 말의 힘만을 가지고 전달이 되면 좋겠다. 그러니까 말을 하는 장르 자체로 어떤 극을 작업하고 싶다. 거기에 랩을 해볼까. 판소리, 아니면 악기 없이 노래를 해볼까. 혹은 영상으로 만들어 볼까.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볼까. 뭐,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없지만, ‘말에 힘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옛날부터 생각했었다. (*9월 29일 김중혁 작가의 장편소설 <나는 농담이다> 출간 기념 행사) 

Q: 노래든 스탠드업이든 나중에 아티스트로서 어떤 장소에 서고 싶은 곳이 있는가?
이랑: 그런 것은 생각 안 해봤다. 그냥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 아닌, 말 자체를 작품처럼 느껴지는 작업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걸 먼저 개발을 해야겠지. 개발도 하고 연습도 하고 그런 다음에 나중에 보여줄 수 있는거니까. 이번 김중혁 작가 행사에서도 스탠드업을 하다가 망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면 뭔가 더 필요하구나, 하고 생각하고 연습한 뒤 좀 더 길게 해보고… 그런 식이겠지. 이번에 친구 둘 앞에서 연습해봤는데 엄청 어렵더라. (웃음) 그냥 말하는 것과 코메디는 전혀 다른 건데, 연기도 들어가고 여러가지 설정도 들어가야 하니까 더 어려운 것 같다. 

Q: 10년 후에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이랑: 모르겠다. (웃음) 그런 것은 생각 안 해봤다. 우리 세대는 내일을 생각한다고 뭐가 되는 세대가 아닌 것 같다. 지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 생각한다. 우리 엄마, 아빠 때는 노력하면 저금하고 집도 살 수 있는 세대인 것 같은데, 우리 때는 노력해도 그게 안된다. 그러니 일단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칭찬 받아야 하고. (웃음) 우리보다 뒷 세대 때는 그게 더 심할 수 있겠지. 아무튼 그런 세대라서 40대가 되었을 때, 아무 것도 안되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20대 때,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한테 결혼하자고 했던 적이 있다. 남자친구는 준비가 되어야지, 뭐가 있어야 하지, 이랬고. 나는 그 말에 “야, 우리는 뭐가 없어, 기다릴 수 없어, 나중에 30대가 되도 없어, 지금 없는 것 그대로 30대가 되어도 없을 거라고 어차피 없으니까, 그냥 지금 하자” 이랬었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웃음) 


11월에 일본 투어를 했던 이랑 밴드 photo by Ryo Mitamura 


Q: 앞으로 한국에서 몇 개의 공연이 잡혀 있고 일본 투어도 있다. 그 외의 다른 활동도 염두해놓고 있는가?
이랑: 일이 많다보니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해야할 일이 더 많아서 못하고 있는게 많다. <집단과 지성>도 몇 개를 편집해서 시나리오집을 쓰고 있는데 편집실에도 가야한다. 영화사에 가서 미팅도 해야되는데 그러려면 시나리오라든가, 하다 못해 트리트먼트라도 써야된다. 그것 말고도 출판사와 네 권 정도 책이 계약되어 있어서 작업해야 한다. 여행 다니면서 쓰는 글을 모은 책도 내야해서 여행도 간간이 가야하고… 그것만 해도 시간이 모자란다. 근데 이번에 일본반이 나와서 홍보해야 하고 영상통화로 인터뷰를 하고, 따로 또 글을 쓰거나 사진 찍거나 하면서 거기에 시간을 쏟고 있다. 일본 투어 준비로도 합주를 하거나 셋리스트 짜다보면 또 뭐 했다고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그리고 연락해야 할 일도 되게 많다. 음반의 경우에 일본하고 한국 레이블이 따로 연락이 온다. 공연하자는 것도 박다함부터 시작해서 다른 사람들이 각자 연락을 해온다. 영화 쪽, 출판사, 편집실, ‘신의 놀이’ 뮤비 감독이나 무용수들, 또 다른 배우들에게도 오고 정신이 없다. 작업실에도 와야 하고. (웃음) 자다가 일어나서 핸드폰 알림 온 것들을 쭉 내려 읽고… 답변하면서 커피 마시고 담배 피는 것만으로도 두세 시간이 흐른다.
뭔가 내일은 뭐할까, 가 아니라 내일은 무조건 이걸 해야 돼, 다. 나는 회사를 안 다닐 뿐이지 일의 양은 되게 많다. 한 3주 정도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일만 하다가 딱 하루만 쉴 때도 있는데 그런 적이 되게 많다. 지금 해야되는 것만으로도 2년은 그냥 흘러갈 것으로 보고 있다. 

Q: 그렇게 해야할 것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다 잘 하고 싶은건가? 일에 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이랑: 나는 더 많이 하고 싶다. 아예 안 자고도 건강할 수 있으면 아예 안 자고 더 많이 하고 싶다. 일중독이라서. (웃음) 일하는게 재미있다. 뭐 다른 건 재미있는 게 없다. 할 수만 있으면 술 마시면서 일하고 싶다. 술 먹으면서 글 쓰고 춤추고. 기왕 놀거면 술 먹으면서 놀고 싶다.
얼마 전에 사격장에 가서 사격을 했는데 재미있었다. 9점을 네 발 쐈다. 10점짜리 한 발도 쏘고. 처음 해봤는데 되게 재미있었다. 그런 식으로 가끔 짧은 시간에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사격을 한다던가, 누구랑 섹스를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잠깐 기분 전환을 팍!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다 일을 한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게 좋다. 일을 좋아하는 타입 같다. 일을 어떻게든 다듬어서 끝내고 그것을 사람들한테 빨리 보여주려고 하는 시스템이 스스로 잡혀 있는 것 같다.
보통 작업을 많이 하면서도 안 보여주는 사람이 진짜 많지 않나. 나는 이상한 거라도 일단 보여주는 것을 좋아한다. 연예인처럼 꾸민 나를 보여주고 싶어한다기 보다… 작업을 보여주고 싶은데, 거기에 나를 적절히 이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심지어 고양이를 이용한다던지. (웃음)
근데 아직도 자기 작업을 공개 안 하려는 주변 친구들이 많다. 걔네들한테 아무리 보여달라고 해도 안 보여주길래, 처음에는 답답해 했는데 이제 와서 보면 그냥 나와는 성향이 다른 거 같더라. (웃음) 지금은 그냥 “넌 예쁘니까 할 수 있어. 존재 자체만으로도 잘 하고 있어. 돈 없어도 돼 내가 밥 사줄게. 대신 말 안 하고 죽지만 마라. 말은 하고 죽어라. 자살 하기 전에 꼭 얘기해라” 하고 말해준다. (웃음) 그러는 게 마음이 편해진다.
본인들도 어떻게든 잘 해보고 타파할 생각들을 하고 있을텐데. 내가 거기에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간섭 해봤자… 괜히 친구들 자존감에 상처주고 도움이 안되더라. 지금도 자기들이 가야할 방법을 찾아가는 모습들일텐데. 물론 나도 남이 얘기하면 안 듣는다. 까먹고. (웃음) 


[인터뷰] 이랑 (1부) - 2016-12-06

[이랑] 헬조선을 살아가는 이랑의 세계 (1부) BY 김종규 · 2016-12-06

*원문 링크: http://webzinem.co.kr/5598


이랑 2016년 9월 21일 ©jongkyukim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 

위 질문은 이랑의 곡 ‘신의 놀이’의 도입 가사다. 올해 들어 국내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부쩍 ‘신의 놀이’가 귀에 맴돈다. 한국에서 산다는 것이 마치 신의 장난스런 놀이처럼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게 된 탓일까. 

이랑은 참 다재다능하다. 그는 2012년 맥북 한 대로 녹음해서 만든 데뷔 앨범 [욘욘슨]을 발표하며 세상에 알려진 뮤지션이다. 만화가로서 <이랑 네컷 만화>, <내가 30대가 됐다>를 발표했고, 영화감독으로서 <유도리>, <변해야 한다> 등을 만들었으며, 최근에는 웹드라마 <출출한 여자>, <게임회사 여직원들>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다. 

올해 이랑은 음악가로서 바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6월에 발매된 정규 2집 [신의 놀이]는 신곡 10곡이 수록된 앨범으로 책과 음악 다운로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솔직하게 쓰여진 글과 더불어 있는 그대로를 노래하는 그의 노래는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의 음악팬들에게까지 큰 울림을 선사하고 있는 중이다. 또,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관객 앞에서 매번 다른 음악가와 즉석에서 곡을 만들었던 공연 <신곡의 방>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공개되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이랑이라는 ‘사람’이 무척 궁금했다. 지난 9월 21일 망원동 작업실에서 이랑을 만날 수 있었다. 1부에서는 음악가 이랑의 활동을 중심으로 다루고, 2부에서는 영화감독 이랑과 그 이외의 면면을 다루기로 한다. 




“신의 놀이”

Q: [신의 놀이]는 4년 만에 나온 앨범이다. 
이랑: 주로 2011년도에서 2013년도에 만든 곡들이다. 1집 [욘욘슨]을 낸 당시에는 바로 다음 해에 새 앨범이 나올 줄 알았다. 근데 앨범을 제작하는 소모임음반 측에서 일이 많다보니 계속 딜레이가 되었다. 나도 이러저런 일을 겪으며 노래를 새로 쓰기도 했다. 그러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와 ‘좋은 소식, 나쁜 소식’ 같은 곡도 나왔고. 

Q: [신의 놀이] 책 구성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글이 쓰여진 시기가 다 다른 것 같더라.
이랑: 책에 실린 글은 이전에 쓴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앨범을 CD 없이 내기로 정한 뒤, 가사집은 어른이 쓰는 손글씨처럼 러프한 느낌의 타이포가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근데 2집에 실린 노래는 반복이 별로 없고 아예 글처럼 느껴지는 것도 있어서 가사집이 점점 두꺼워졌다. 그러니 부클릿 두께에 욕심이 나더라. 가사가 많은데 기왕이면 글이 좀 더 있었으면 했다.
안 그래도 2, 3년 전에 한 출판사와 에세이집을 계약한 것도 있고 원래부터 글을 계속 쓰고 있긴 했다. 그 동안 모은 글을 소모임음반에 보여줬더니 “앨범에 같이 실으면 좋을 것 같으니 노래 내용과 맞는 글을 찾아보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출판사 측에서도 그에 동의했다. 그렇게 원고 중의 일부를 찾았고 그 과정에서 글을 새로 쓰기도 했다. 그러면서 단락 별로 글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지금의 배치대로 책이 완성되었다. CD는 음악의 흐름을, 책은 글의 흐름대로 읽으시면 좋을 것 같다. 

Q: 앨범 커버가 마치 장례식 영정사진 같이 보인다.
이랑: 어쩌면 유작이 될 수도 있고. (웃음) 애초에 시체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다. 소모임음반 사장님과 나는 이 앨범의 별명을 ‘이랑 자살 방지 앨범’이라고 부른다. 자살하고 싶을 때마다 노래를 부른 것도 있고, 이 앨범 내기 전에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심정을 표현하는 색깔로 검은색이 들어갔다.
현재의 커버 사진은 처음부터 커버용으로 찍은 것은 아니었다. 친구 중에 일본인 화가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에게 [신의 놀이] 앨범 커버로 쓸 초상화를 부탁하려고 샘플로 찍은 사진이다. 인디, 여성, 30대 등의 소재는 워낙 많으니까 기존의 앨범 커버 이미지에서는 벗어나야 했다. 필카로 러프하게 찍은 이미지나 무게 잡고 시커멓게 찍은 사진 같은 것은 이미 많이 소비되고 있고… 뽀샤시하고 예쁜 사진은 나한테는 안 어울리고. 그래서 어둡게 하되 까만 배경의 초상화를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친구는 정물화가다. 나는 이 친구의 작업물을 좋아하는데 오직 정물화만 그리고 인간을 그리지 않는다. 인간을 한번도 그린 적이 없다고 했다. 친구는 ‘사라지는 정물화’라는 연작을 그리고 있다. 예를 들어 테이블 위에 먹을 것과 여러 가지 집기들이 반투명인채 놓여 있는데 보고 있으면 되게 기묘한 느낌이 든다. 그런 인간을 그리지 않는 사람이 인간을 그리면 뭔가 기묘한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초상화 속 내 모습이 무슨 시체처럼 그려질 것이라 생각했다. 뭔가 딱딱하면서 생물이 아닌 듯한.
그런데 결과물을 보니 얼굴이 너무 닮은 것도 아니고 안 닮은 것도 아니고… 애매해서 포기했다. (웃음) 초상화는 친구에게 정식으로 구입했다. 그리고 처음에 찍은 샘플 사진을 아예 커버용으로 결정하고 비용도 다시 지불했다. 친구가 그린 그림을 커버로 쓰이지는 않아서 아쉽게 되었지만, 일본판 책에 그 친구의 다른 그림이 실리게 됐다. 결과적으로는 잘 된 것 같다. 


[신의 놀이] ©jongkyukim 


Q: [신의 놀이] 앨범에는 CD가 안 들어있다.
이랑: 지금 사람들에게 CD 플레이어가 없으니까. 일단 나부터도 없다. 일본에 가면 친구들이 CD나 DVD를 선물로 주는데 플레이어도 없고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노릇인데. (웃음)
얼마 전에 이런 것을 봤다. 한 온라인 음반 사이트의 댓글 중에 누가 “저는 이 앨범에 CD가 없다고 해서 안 삽니다” 이러더라. CD부심 같은 건가. 그러면 일본판을 사면 된다. 가격은 두배다. (웃음)
또 다른 일로는 앨범에 들어있는 온라인 다운로드 코드가 작동을 안 한다고 메일을 보낸 사람이 있었다. 다운이 안되니까 음원을 보내달라는 얘기인데… 그런 경우에는 우리 쪽에서 코드가 작동되는지 직접 확인해야 하니 알려 달라고 한다. 개별 코드니까. 근데 확인해보니 없는 번호인 거다. 지어서 보낸 거고 앨범도 안 샀으면서 뻥친 거다. 그런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그런 머리 쓸 시간에 그냥 앨범 사고 말지. (웃음) 

Q: 나중에라도 [신의 놀이] 한국판을 CD로 낼 생각은 없는가?
이랑: CD보다는 LP로 내고 싶다. LP가 큼직하니 앨범 커버도 크게 나오니까 소장하기에도 좋을 것 같고. 만약 LP로 나온다면 지금의 곡 순서를 좀 바꾸고 싶다. 일단 LP 제작은 생각 중이다. 

Q: 데드라인이 없이 앨범 작업을 했다고 들었는데 실제로도 작업 기간이 길었나?
이랑: 가라지밴드(GarageBand)로는 훨씬 전에 이미 다 만들어져 있었다. 데모곡 중에 [욘욘슨] 때부터 있던 곡이나 공연 때마다 부르던 곡도 있었고. 그런 곡들 중에 추려서 레코딩 작업을 다시 했다. 나는 스튜디오 녹음 경험이 없기도 하고 소모임음반 사장님은 사장님대로 본업이 있어서 한두 달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이런 식으로 정해진 일정 없이 작업했다. 어느날은 드럼만 하루만에 녹음을 다 하고 또, 한 달 있다가는 베이스를 하고, 두 달 뒤에는 첼로를 다 하고, 그 다음에 나 혼자 다 하고… 이런 식이었다. 되게 띄엄띄엄했다. 녹음이 끝나고 믹싱도 그런 식으로 했다. 다들 시간 맞추기도 어렵다보니… 나도 처음에는 안달복달 하다가 나중에는 해탈한 채로 지냈다. 그러면서 내 개인 작업도 해야했고. 




Q: 기간이 길어서 많은 일들이 있었을텐데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사건이 있을까?
이랑: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게 앨범을 진행했다. 그러다 중간에 있었던 일 하나가 있다. 그때 내가 29살이었으니 2년 전 일이다. 되게 초조하더라. 30대에 대한 두려움 같은게 있어가지고… ‘이제 어리지 않다’, ‘이제 내가 다 책임을 져야할 때가 다가온다’, ‘이제 내가 실수해도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 같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아직 실수를 할 수 있을 때, 욕 먹어도 괜찮은 나이에 2집을 내고 싶었다. 애초에 음악도 다 있었으니까. 뭐 이때까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아직 없었지만.
27살에 1집을 냈으니 당장 28살에 2집이 나올 줄 알았다. 근데 29살이 되었는데도 안 나왔고… 그래서 사장님네에 가서 울었다. “나 진짜 서른 살에 앨범 내기 싫어, 서른 살 싱어송라이터는 싫단 말야”면서. (웃음) 그때 나는 고정관념인지, 선입견에 빠져서 30대가 되면 너무 어른 같아서 정말 실수하면 안될 것 같더라.
그때 우리 엄마는 내게 전화만 하면 “너 빨리 영어선생님 되라” 같은 이런 얘기를 하셨다. (웃음) 속된 말로 취미생활이라고 부르는 이런 일을 30대에도 하는 것이 가능할까,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를 들어 보면 “또 하루 멀어져 간다…” 이런 가사도 있지 않나. 괜히 사람을 힘들게 만들고 불안하고 무섭고 책임감을 느끼게 하고 말이다. (웃음) 그런데 막상 30대가 되니까 아무 생각도 없다. 그냥 살면 되더라. (웃음) 

Q: 이번 앨범에 첼로의 비중이 상당한데다 앨범 전체적으로 연주가 훌륭한 것 같다.
이랑: 데모를 만들 때 혼자서 기타 치는게 너무 재미 없었다. 1집 때만 해도 코드를 두세 개 밖에 몰랐었으니까. 코드를 하나 알게 될 때마다 기뻐서 노래를 하나 씩 만들었다. “우와, 이 소리 신기하다” 라며. 그러다 한계에 부딪혔다. 거기서 실력이 더 올라가려면 코드를 더 배우고 핑거링 같은 테크닉 연습을 엄청 해야하는데 문제는 손이 너무 아팠다. 정코드인 A, C, E, F, G 코드가 끝나서 할 게 없으니 더욱 기타를 치기 싫었다. 그래서 가라지밴드로 음악 만들면서 직접 연주를 안 하고 가상악기를 가지고만 만들었고. (웃음)
소모임음반에서 데모를 듣더니 이건 진짜 악기가 들어가면 좋겠다, 해서 세션을 섭외했다. 실제로 악기가 들어가고 사람이 직접 연주하니까 엄청나게 좋더라. 합주를 시작하면 진짜 앨범처럼 연주가 들리는데… 나는 혼자 노래하고 기타 치느라 정신이 없고. (웃음) 그러다 중간에 누가 틀리면 그때서야 옆에서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했는데 그런 점도 너무 신기했다. (웃음) 그런데 워낙 사람 모으기가 힘들지 않나…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전자음악을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번에 일본 투어를 준비하는데 멤버들의 비행기 티켓을 구하는 것조차 예상했던 상황하고 너무 다르기도 해서. 

Q: 1집에 이어 2집에도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를 거론했다. 관련해서 곡도 만들었고.
이랑: 커트 보네거트를 진짜 좋아한다. 그 전에도 소설 같은 것을 많이 읽었지만 다들 읽는 것들… 무라카미 하루키라든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작가들을 읽었다. (웃음) 대학생이 되어 뭘 읽을까 고민하던 차에 그 당시에 알게 된 한 영화 감독이 커트 보네거트를 추천해 주었다. 나중에 커트 보네거트의 책 중에 하나를 사서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모두 읽었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취향을 갖게 된 것 같다. 처음에는 전형적인 소설 형식이 아니라서 머리속에 잘 안 들어왔는데, 읽고 또 읽으니까 새로운 레이어가 이해되고 더 재미있더라. 좋아하면 좋아할 수록 좋은 작가다.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니까 2006년에 처음 읽은 건데, 그 당시에는 커트 보네거트가 아직 살아 계셨다. 책을 읽고 너무 좋아해서 ‘나는 무조건 미국에 가서 만날 거다’며 내 나름의 목표를 잡았었는데… 얼마 안 있어 돌아가셨다. 그때는 한참을 목표를 잃은 기분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최근에 데이비드 실즈(David Shields)를 좋아하는데 이 분은 부디 안 돌아가셨으면 좋겠다. 

Q: 학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고등학교를 일찍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봤다고 들었다.
이랑: 나는 고등학교에 안 간 것이 인생 최고의 자랑이다.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중학교부터 안 가고 싶다. 중학교 때는 자퇴라는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졸업 후 친구 중 한명이 고등학교에 안 가고 검정고시 치른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그런 선택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안 말해줬으니까.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는 시험을 치르고 들어가던 때인데 나는 이미 들어갈 학교가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이거 첫날부터 안되겠더라. (웃음) 바로 엄마한테 가서 계속 조르고 울고 불며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해서 결국에는 안 갔다. 

Q: 지금보면 고등학교에 안 간 것을 이득으로 보는가?
이랑: 개이득이었다. (웃음) 시간도 진짜 많고. 지금은 하루가 허겁지겁 가는데 그때는 여유만만해서 수영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보고 걸어다니고 산책하고 그랬다. 시간도 많고 체력도 좋았었다. 책을 되게 빨리 읽는 편인데 그때는 하루에 6권도 읽었고 소설책은 한두 시간이면 다 읽었다. 시리즈물은 물론이고 공상과학물이라던가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해리 포터>… 그런 걸 다 읽으면 무슨 이상한 실용서도 봤고 채팅도 많이 했고. (웃음)
지금은 너무 바쁘다. 하루가 너무 짧다. 일단 오후 세 시, 네 시에 하루를 시작하니까. 잠은 오전 다섯 시에 잔다. 엄마가 그렇게 살면 암에 걸린다고 했다. 내가 암 걸릴 때쯤에 안락사가 허용되겠지. (웃음) 

Q: 이번 [신의 놀이] 앨범에서 죽음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만약에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죽는다면 어떻게 죽고 싶은가?
이랑: 가능하면 안락사가 되는 나라에서 죽고 싶다. 원래 일찍 죽고 싶었는데 최근에는 그래도 50살 전까지는 살아보기로 했다. 조금 아프기는 해도 그때까진 어떻게든 일도 할 수 있고 살만할 것 같고. 그런 뒤에 죽고 싶다.
그게 안되면… 얼마 전에 친구랑 이야기하던 중에 나온 이야기인데, 안락사할 돈으로 차라리 영국 같은 나라의 비싼 호텔의 스위트룸 같은 곳을 빌려서 인사불성 될 때까지 술과 약에 취해서 뛰어 내리자고 했다. (웃음) 뛰어내린다는 자각이 없을 때까지, 취해서… “뛰어 내리자! 아으, 좋다” 이러면서. (웃음) 자살하는 것에 가장 큰 걸림돌은 아픈 것에 대한 공포니까… 아무튼 뭐, 그런 얘기를 했었다. 

Q: 다른 인터뷰 때도 죽음에 관한 질문을 했을 것 같다.
이랑: 한 것 같다. 노래에서도 다 죽는 얘기만 하니까. [신의 놀이]를 내기 직전에 한 친구가 자살했다. 얼마 뒤 했던 인터뷰에서 “어떻게 죽고 싶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친구가 죽은지 얼마 안되었을 때여서 그 말에 혼자 막 울었다. 친구가 말도 안하고 자살하니까, 안타깝고 아쉽고…
나도 자살하고 싶지만 안 하는건데. 만약 나한테 얘기했으면 내가 얼마나 욕하면서도 살고 있는지 말해주면서 그냥 재미있게 지내자 같은, 그런 얘길 하면 좋았을텐데. 앨범을 빨리 내서 그 친구가 읽었더라면 이랑도 진짜 힘든가 보다, 했을텐데. 그런 말도 할 겨를도 없어가지고… 내가 그러고 있으니까 인터뷰어가 결국 그 다음 질문을 못 하더라. 


일본판 [신의 놀이] – 이랑 트위터 캡쳐 


Q: 얼마 전부터 일본쪽 소식을 많이 올리길래 일본에 가 있는 줄 알았다.
이랑: 마침 추석 연휴 즈음해서 [신의 놀이]와 [욘욘슨]이 일본에서 동시 발매되었다. 이미 그 전에 일본에서 한 인터뷰도 앨범 발표와 함께 공개가 되었다. 계속 정보가 뜨니까 무슨 일본에 있는 것 마냥 된 것 같다. 

Q: 일본에서 앨범 반응은 어떤 것 같은가?
이랑: [신의 놀이]가 빠른 속도로 팔린다고 들었다. 일본에 있는 친구들에게서도 [신의 놀이]가 품절되고 반응이 좋다고 연락이 왔다. 이번에 공개된 것 중에 일본의 한 매거진인 <바이스(Vice)>에서 한 인터뷰가 있다. 처음에는 <바이스>가 일본 내에서도 힙한 느낌의 잡지라서 질문이 평범할 줄 알았다. 근데 인터뷰를 하셨던 분이 그쪽 음악계에서 꽤 활동했고 나이도 있으셔서 그런지 능숙하게 이야기를 잘 풀더라. ‘Who are you?’ 라는 섹션에 실렸는데, 코너 자체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고 인터뷰하는 아티스트를 알려야겠다는 사명감도 느껴졌다. 그러면서 인간에 대한 관심도 있어서… 뭔가 통하는게 있었다.
대체로 처음 만난 일본 사람한테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헬조선 같은 단어를 쓰면 깜짝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한다. 대부분 괜히 미안해하고 이상한 죄의식이 사로잡혀서 땀을 뻘뻘 흘리고 그런다. 그런데 <바이스>의 인터뷰어는 그런 이야기들이 왜 필요한 것인지 잘 풀어서 이야기가 되게 잘 나왔다. 인터뷰에서 나는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며 식민지라던가 군대 문화, 헬조선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내용이 검열 없이 다 나가서 여기저기서 적나라하고 솔직하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그 내용 때문에 현지에서도 난리가 났다고. 

Q: 읽어보니 흥미로운 인터뷰였다. 한국에서 했던 인터뷰들하고는 성격이 많이 다른 것도 있고.
이랑: 일본에 가서 인터뷰 할 때마다 그 이야기는 다 했다. 왜냐하면 앨범 이야기를 하게 될 때 “왜 그런 음악을 만드냐”, “왜 이런 글을 쓰냐”고 질문을 하니까. 당연히 지금 살고 있는 상황이나 사회 현상 같은 것들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한국 매체와 인터뷰를 하면 최근 제일 많이 화제가 됐던 페미니즘 같은 이슈 쪽으로 흐르지 않나.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쪽으로 말한 거다. 뜬금없이 “메밀국수가 먹고 싶어서 만들었어요” 이럴 수는 없고. (웃음)
애초에 사회란 게 너무 어렵고 복잡한 거니까. 한국 사회가 왜 어려운지 설명하려면 군대문화, 군사정권, 식민지, 한국전쟁… 이런 키워드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나라에서 자란 사람이니까 이런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인터뷰를 시작했지만 가면 갈 수록 진지해져서 있는 그대로를 다 말했다.
내 생각에 일본의 특징은 민감한 이야기를 잘 말하지 않는다. 서로 예의를 지키고 피해를 주지 말자는 인식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나라라서 다이렉트로 말을 잘 안 한다. 정치적인 것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젊은 사람은 더 그렇다. 우리나라 젊은 사람은 농담으로라도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나 대통령을 별명으로 부르고…
아무튼 일본에서의 인터뷰 이후에 파급력이 굉장했다. 찾아보니까 울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도 헬이에요” 하면서 너무 공감했다, 놀랍다, 라는 의견도 보였고. 힙해보이는 매거진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니까 깜짝 놀랐다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내 앨범이 잘 팔린다고 한다. (웃음) 일본 쪽 레이블 사장님도 그 인터뷰의 반향이 대단하다고 했다. 

Q: [신의 놀이]를 읽어보니 일본에 자주 가는 것 같았다. 어쩐지 현지 문화에도 익숙해 보인다.
이랑: 한국에서 [욘욘슨]을 내기 전에 투어를 갔었다. 1년에 두세 번 정도 간다.
일본 음반사의 특징은 발표일에 비해서 앨범 제작을 훨씬 일찍 진행을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본 제품이 나오자마자 바로 파는데 일본은 만들고서 한두 달 정도는 홍보만 한다. 나의 경우는 두달까진 아니었지만.
앨범이 나오면 기자나 평론가 같은 음악 관계자들에게 1차적으로 홍보용을 뿌리고 보도자료 돌린 뒤 인터뷰까지 다 끝낸다. 홍보 메일로는 지금 앨범이 어느정도까지 제작 진행이 되고 있고… 그런 식으로 앨범을 팔기 전에 어느 정도 홍보 기간을 갖는다.
공연의 경우, 한국에서는 주로 “이번 주 일요일에 공연이 있습니다” 라며 SNS로 홍보한다. 근데 일본은 두세 달 전부터 홍보를 한다. 20명 정도 모이는 인디 뮤지션의 공연이라도 훨씬 전부터 홍보한다. 2달 전에 공연 전단지를 만들어서 클럽마다 비치하고 공연 보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계속 뿌리고… 그런 홍보 활동이 일반적이다.
일본은 갑작스러운 것을 진짜 안 좋아한다. 친구랑 “오늘 만나자” 하는 것도 안된다. 약속은 그 전부터 미리미리 해야한다. 친구든 연인이든 마찬가지다. 간섭하고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니까. 말로는 안 그러지만 막상 그 상황에 닥치면 들어주지 않는다. 물론 이런 예약문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본인도 있다. 서로 계속 거리를 유지하면서 남에게 피해를 안 끼치려고 하는 분위기를 지겨워 하는 일부 일본 사람들은 한국에 오면 되려 편안해하고 좋아하는 것 같더라. 

Q: 한국하고 비교했을 때 공연문화 쪽은 어떤가?
이랑: 일본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일본 음악팬들은 한번 좋아해주면 끝까지 좋아해준다. 공연을 거듭할 수록 처음부터 좋아해주는 팬이 계속 있고,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서 점점 불어난다. 그래서 공연 하는 입장에서는 갈 때마다 안심을 하고 간다. 한국하고 비교하면 절대 씬의 규모도 다르다.
한국의 경우, 정량이 있으면 계속 새로운 사람들로 교체되는 형국이다. 우선 인디 음악을 좋아하는 층이 한정되어 있고, 그 사람들이 한창 1, 2년 정도는 공연을 보러 와도 나중에서는 바쁘던가 흥미가 떨어져서 안 온다. 그렇게 빈 자리를 새로운 사람들이 유입되어 채우는 식이다. 그래서 관객이 몇 명이나 올 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작년에 했던 <신곡의 방> 공연에서는 들어오는 인원 수가 한계가 있어서 예매를 빨리 풀었더니 당일이 됐는데도 안 오는 경우가 있었다. 작은 공연장에서 20명 정도만 모아놓고 하는 거라서 10명이 안 오게 되면 엄청나게 썰렁해진다. 그렇다고 새로운 관객이 당일 공연에 결정해서 오는 것은 힘들고.
나중에는 적당한 요령을 찾았다. 예매를 받을 때 애초에 들어올 수 있는 관객수보다 좀 더 받은 다음에 마감한다. 그러면 그 중에서 한 8명 정도는 안 온다. 그 사람들이 빠지면 결과적으로는 딱 적절한 수의 관객이 모인다. 소규모 공연장이 꽉 찰 만큼. (웃음) 공연이란게 인원을 장소와 딱 맞춰서 받으면 안된다. 변수는 항상 있으니까. 이것도 일본 애들한테 노하우를 들었다. (웃음)




Q: 2집 [신의 놀이]와 1집 [욘욘슨]. 한국판과 일본판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랑: 비슷한데 다르다. 일본판은 한국판과 비슷하면서도 달라야 하니까 디자인에 대해 일본측 레이블과 심도 깊게 이야기를 했다. 영상 통화도 하면서. (웃음)
일단 일본판 [신의 놀이]는 케이스 안에 책과 CD가 들어있는 구성이다. 책은 일본판답게 왼쪽으로 펼쳐지며 글은 세로로 쓰여져 있다. 또 한국판에는 없는, 아까 얘기한 일본인 화가 친구의 삽화가 수록되어 있다. 삽화가 인쇄된 종이는 일반 종이와 다르게 투명하고 글자도 비치는 특수한 재질이다. 또, 원래는 음반이 책에 바로 붙은 형태로 나오려고 했는데 번역을 해서 붙여보니까 책이 너무 두꺼워졌다. 근데 두께가 감당을 못해서 따로 케이스에 책과 CD가 들어있는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이렇듯 패키지에 시간과 공을 많이 들였다. [욘욘슨]의 가사집은 내가 직접 손으로 썼는데 힘들었다. (웃음) 한자를 몰라서 컴퓨터 모니터에 크게 띄워 놓고 글씨를 한자 한자 손으로 따라서 그렸는데 진짜 고생했다. 가사집에 실린 그림도 새로 다시 그렸다. 

Q: 한국판 못지 않게 일본판 앨범들도 소장가치가 높은 것 같다.
이랑: 지금 당장 한국에서는 일본판을 정식 수입할 계획이 없고 아마 11월 쯤에나 한다고 하더라. 일단 한국판을 좀 더 팔아야 하고. (웃음) 근데 일본판의 가격이 싸진 않다. 일본판 [신의 놀이]는 무려 2500엔이다. 또, [욘욘슨] 일본판은 2000엔이다. 가격으로 치면 2배다. 나중에 국내에서 역수입한 일본판을 사려면 그보다 훨씬 더 값을 치뤄야할 거다. 한국은 CD가 만원을 넘으면 비싸다고 생각하니까… 아무래도 일본판은 패키지에 공을 많이 들인 게 있어서 한국판에 비해 비싼 것 같다. 

Q: [신의 놀이]가 일본에서도 발표되고 반응이 워낙 좋다니까 공연을 할 것 같은데.
이랑: 투어를 하기로 되어 있다. 11월 18일부터 29일까지 총 9번 정도 있다. 앞서 6번 정도는 나와 첼리스트 이혜지만 가고 도쿄와 간사이 지방에서 하는 두 번의 큰 공연 때는 밴드 셋으로 갈 예정이다. 밴드 멤버까지 전부 5명이다. 지금 비행기 티켓을 사고 있다. 나와 첼로는 티켓을 샀고 이제 후발대의 티켓을 사야한다. 투어 준비를 되게 빨리 했는데 두 달 전부터 밴드 연습하고 포스터 이미지를 준비하고 셋 리스트도 보냈다. 한국 공연을 위해서 준비하는 게 아니다. (웃음) 

Q: 오히려 한국에서는 이랑 씨가 더이상 앨범을 내지 않는다고 해서 난리였다. (웃음)
이랑: 미스 커뮤니케이션 같은 게 있었다. 소모임음반에게서 앞으로의 앨범제작이 불투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음악보다는 원래의 본업을 하신다고 한다. 예전 [욘욘슨]이 나오기 전의 나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뮤지션이었다. 그때 소모임음반 사장님은 이랑의 음악이 너무 좋으니 사비를 털어서라도 앨범을 내야겠다고 했었다고. (웃음) 그만큼 잘 되긴 했지만 그럴수록 일은 점점 많아졌고 바빠졌다. 음악 제작만 해서는 먹고 살 수 있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소모임음반이 더이상 앨범을 안 만든다니까 나도 어찌 될지 모르겠다,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한 말이었는데… (웃음) 그렇게 일이 커졌다. 이미 보내진 보도자료는 어쩔 수가 없고 현재 웹사이트의 앨범 소개에서는 그 내용이 삭제되었다. 이 얘기는 아직도 인터뷰 때마다 물어본다. (웃음) 물어보면 음악을 안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음악을 안 만든지 오래되기도 해서. 


8월 20일 벨로주. 첼리스트 이혜지와. ©jongkyukim 


Q: 8월 20일에 아오바 이치코(Aoba Ichiko)와 스킵스킵벤벤(skip skip ben ben)의 내한 공연 때 오프닝을 섰다. 이랑 씨가 [신의 놀이]를 발표한 후 공식적인 첫 공연날이다. 그날 이랑 씨의 입으로 앞서 언급한 세상을 떠난 친구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신보를 냈는데도 왜 한동안 공연하지 않겠다고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랑: 그날 공연 때 입었던 친구의 자켓은 지금 내 작업실 의자에 걸쳐 있고… 그런 여러가지 신상에 일이 있어서 원래는 그 공연을 취소하려고 했다. 근데 그 공연의 기획자가 친구들이다. 한국 관객들은 아오바 이치코와 스킵스킵벤벤에 대해 아직 잘 모르니까 뭔가 홍보를 해야했다. 전에 대만에서 공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 스킵스킵벤벤이 오프닝을 서줬던 경험도 있었고… 그런 경우에 현지 아티스트가 서포트를 해줘야 하지 않나. 내가 취소하면 티켓 환불이 들어오니까. 친구들이 “상황이 안 좋은건 알고는 있는데 미안하지만 그래도 해주면 안되냐?” (웃음) 라고 해서 그냥 공연을 했다. 

Q: 그날 이랑 씨의 오프닝 공연은 엄청난 임팩트가 있었다. 공연 후반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를 불렀다. 7분에 육박하고 반복도 없는 곡을 쉬지 않고 어렵지 않게 부르는데 어떻게 하면 그리 할 수 있나? 
이랑: 공연이 너무 엄숙하지 않았나? (웃음) 나중에 이날 후기들을 찾아보니까 운 사람도 있었다던데.
아무튼 7-8분 동안 노래 부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원래 기교나 가창력을 요구하는 곡이 아니다 보니. 처음에는 일기를 쓰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노래로 만들어지면서 호흡이나 억양 같은 것들을 조정해가면서 가사를 만든다. 혼자 노래를 부르다가 여기서는 말을 바꿔야겠다, 싶으면 바꾸고. 쭉 가다 발음이 꼬인다면 여기서는 무조건 쉬고, 혹은 어떤 부분에서는 숨을 참고 이어가는 식으로… 설계를 하듯이 곡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오랫동안 만든 곡들은 완전히 숙지가 되어 있는 상태라서 가사를 잊어먹지 않는다. 일단 노래를 시작하기만 하면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전체적인 덩어리’가 곡 끝날 때까지 다 나온다. 그냥 저절로 노래가 나온다고 보면 되겠다. 대신에 공연장에서는 당시의 감정 같은 것들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Q: 마지막에 예고없이 2곡을 더 이어서 노래해서 깜짝 놀랐다. 
이랑: 새 앨범을 내고 처음 하는 공연이다보니 혹시라도 앵콜이 나올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야했다. (웃음) 첼로랑 연습하면서 셋리스트를 짤 때 마지막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를 한 뒤에 ‘나는 왜 알아요’하고 ‘웃어, 유머에’를 바로 붙여서 부르기로 했다. 세 곡을 연이어 붙이면 하는 사람도 힘들고 듣는 사람도 힘드니까. 아무도 앵콜을 못하게 분위기를 확 죽여버리고 집에 가자, 며. (웃음) 근데 세 곡을 연달아 하다보니 목말라 죽는 줄 알았다. (웃음)
원래 ‘나는 왜 알아요’하고 ‘웃어, 유머에’. 그 두 곡은 만들 때부터 안 끊어지게 붙어있는 곡이었다. 근데 막상 [신의 놀이] 앨범 트랙 리스트를 짤 때 그 둘을 붙였더니 중간 곡들이 너무 애매해지는 거다. 흐름이 다 무너진다고 해야하나. 상대적으로 조용한 곡들이 많은 것도 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왜 알아요’하고 ‘웃어, 유머에’를 떼어 놓고 1번부터 5번을 A면, 그 외 나머지들을 B면. 이런 식으로 짰다. (웃음) 아무튼 원래 의도대로라면 ‘나는 왜 알아요’가 끝난 뒤 바로 ‘웃어, 유머에’가 나와야 한다.
‘웃어, 유머에’의 데모 버전은 초등학교 애들하고 음악 녹음을 같이 해서 만들었다. 처음에 애들이 영어단어 laughter를 “l, a, u, g, h, t, e, r.” 라고 한 글자 씩 말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짝짝짝 친 뒤 “하하하…” 하고 시작하는 거였다. 근데 애들이 박수를 치면 칠 수록 흥분해서 박자가 더 안 맞아서… 그것 자체로도 재미있어서 넣고 싶었는데. (웃음) 지금은 비공식 음원이 되었으니 나중에 사운드클라우드 같은 데다 올려 놓을지도 모르겠다.




Q: 그날 공연에서 굉장한 울림을 준 곡으로 ‘환란의 세대‘가 있었다. 어쩌다보니 [신의 놀이] 앨범에는 수록이 되지 않은 곡이라고 들었다. 그에 대한 일화가 있는가?
이랑: 원래 내가 만든 노래가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감을 잘 잡는 편이 아니다. 일단 만들고 싶어서 만들긴 하지만 스스로 프로뮤지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다보니 기왕이면 나를 아는 사람이 평가해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동안 곡을 만들면 소모임음반 사장님에게 바로 바로 보냈다. [욘욘슨] 때는 처음이었으니까 보내면 금방 리액션이 왔는데, [신의 놀이] 할 때 쯤에는 받고서 “어, 나중에 볼게” 하고 그러다 까먹으시곤 했다. (웃음)
아무튼 ‘환란의 세대’가 안 실린 것은 나름의 사정이 있다. 작년에 나는 매달 1번의 공연 마다 한 곡씩 만드는 <신곡의 방>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제일 마지막에 만들어진 ‘환란의 세대’를 끝으로 종료했다. 곡을 만들고 나서도 이게 특별히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사장님에게 메일을 보냈고 그러면서 다른 한 곡도 같이 보냈다. 문제는 여기서 뭔가 오해가 있었다.
사실 <신곡의 방>이 끝나고 그 바로 다음날에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소설을 읽는 10가지 방법’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좋아하는 소설가를 소개하는 코너였기에 커트 보네거트의 책 얘기를 했다. 거기서 나는 “마침 어제 <신곡의 방>이라는 프로젝트를 끝냈는데 제가 노래를 참 쉽게 만들기도 해서 여러분들께 한번 보여 드리겠다”며,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친 뒤 거기 모인 사람들과 함께 즉석에서 15분 만에 노래를 만들어서 녹음했다. 그게 [신의 놀이] 앨범에 수록된 ‘좋은 소식, 나쁜 소식’이다. 나는 평소대로 어제랑 그제랑 곡을 만들었으니까 한번 들어보시라고, 사장님에게 ‘환란의 세대’와 같이 해서 메일로 보냈다.
그런데 그 멘트를 오해하신 거다. 나는 어제랑 그제에 한 곡씩 만들었다는 의미로 메일을 보냈는데, 사장님은 내가 어제랑 그제에 걸쳐서 한 곡을 만들었다는 줄 알았던 거다. 어차피 메일 두 개가 중복이니까 먼저 온 메일은 안 건드려도 된다 생각하신 거고. (웃음) 바로 사장님에게서 ‘좋은 소식, 나쁜 소식’을 앨범에 넣자는 회신이 왔다. ‘그럼 환란의 세대는?’ 따로 피드백이 없길래 아쉽지만 이번 앨범에 안 넣으려나 보다 했다.
나중에 [신의 놀이] 앨범 디자인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신곡의 방>의 결과물인 컴필레이션 앨범이 먼저 나와서 사장님에게 들려줬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다가 마지막 ‘환란의 세대’에서 깜짝 놀라더라. 전후사정을 알게 된 뒤에 사장님은 “아, 이거 앨범에 넣어야 되는데, 어떻게 하지. 다시 만들까?” 했다. (웃음)
<신곡의 방> 때 만든 ‘환란의 세대’는 다른 곡들과는 다르게 아직도 까먹고 잘 안될 때가 있다. 워낙 즉흥적으로 만든 곡이라 가사 숙지가 잘 안되기도 하고… 녹음 할 때도 가사를 보면서 했다. 지난 공연 때는 혹시라도 실수할까봐 팔에 가사를 다 적었다. (웃음) 첼로랑 같이 한 두 테이크 밖에 안 했었고, 곡의 수정도 별로 안 했다. 근데 라이브 때는 약간 다르게 하거나 실수를 해도 되니까 편하게 할 수 있어서 좋다. 


[신곡의 방 컴필레이션] ©jongkyukim


“신곡의 방” 

Q: 한 달에 한 번 다른 뮤지션들과 한 곡씩 만드는 <신곡의 방>은 어떻게 하게 된 것인가?
이랑: 부담도 있었지만 재미있게 끝냈다. 일본 원작의 포맷을 똑같이 가져왔다. 일본 원작은 호스트가 남자고 게스트로 출연하는 뮤지션은 격월로 남녀가 바뀌어서 나온다. 이번 달은 남자, 다음 달은 여자, 이런 식으로. 일본 원작을 처음 봤을 때가 2년 전인데… 내가 갔을 때가 세번 째였고 싱어송라이터 시바타 사토코(Shibata Satoko)가 게스트였을 때였다.
그때는 일본어를 지금에 비하면 좀 못했다. 그래서 알아듣기가 약간 힘들더라. 근데 공연을 네 시간이나 하는 거다. (웃음) 장소가 되게 좋은 바였고 25명 정도만 볼 수 있었는데, 자리가 없어서 바 안 쪽 카운터 안에서 서서 봤다. 네 시간 동안 서서 있으니까 힘들어 죽겠는데… (웃음) 일본 사람들이 워낙 예의를 중요시 하다보니 중간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혼자 막 괴로워 하면서 중간에 녹음도 잠깐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만드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어떤 ‘완성의 순간’ 같은 광경을 목격했다. 관객임에도 엄청난 희열이 있더라. 보는 사람도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이 너무 좋다고 생각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각자가 느끼는 완성의 순간이 다 다르다는 점이다. 호스트는 뭔가 아쉬운지 한 테이크만 더 하자고 했는데, 나는 ‘이제 됐다. 이제 그만 해도 된다’고 생각했고… 역시나 잘되지 않았다. 혼자 속으로 ‘그 전에 했던 게 완성이라니까’ 이러고. (웃음) 그런게 너무 재미있었다.
그 공연을 했던 사람들이 다 내 친구들이다. 이런 공연일 줄은 전혀 모르고서 놀러간 거다. 딴 것은 모르겠고 막판에 느낀 그 엄청난 것 때문에 ‘이건 내가 무조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중에 친구를 다시 만나 <신곡의 방>이 너무 좋아서 나도 하고 싶다고 했더니, 괜찮으니 대신 라이선스만 써달라고 답했다. 곧바로 귀국해서 공연기획자인 박다함을 만나서 같이 하게 되었다. 2년 전인 2014년 3월에 일본에서 <신곡의 방>을 처음 봤고 나는 10월부터 시작했다. 

Q: 이랑 씨의 <신곡의 방>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가?
이랑: 일단 첫 타자를 누구로 할까 엄청 고민하다가 김목인 씨와 하기로 했다. 워낙 철저한 사람인데다 잘 하니까. 김목인 씨면 못해도 중박이었고. (웃음) 아무튼 모두 재미있는 뮤지션들이고 반응이 다 달라서 즐거웠다. (웃음) 다들 잘 하고 못 하는 지점이 분명하니까, 매번 그것을 맞추고 찾아가는 과정이 힘들긴 해도 나에게는 되게 꿀잼이었다. (웃음) 어떤 분은 가사에 맞춰 곡을 쓰거나, 누구는 멜로디에 맞춰서 가사를 쓰기도 하고, 가사 쓰는 것 자체를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음악은 다 만들었는데 노래 부르는 것을 진짜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어 키라라 같은 경우는 노래하고 가사 쓰는 것에 자신 없어 하길래, 그러면 왜 자신이 없는지 한번 얘기해보라고 물었더니 뭔가를 막 얘기했다. 다 듣고서 “네 얘기를 그냥 나레이션으로 넣자”고 했더니 키라라도 재미있어 하더라. 그것을 그대로 녹음했다. 김목인 씨 같은 경우는 가사 수첩 같은 것을 보여주면서 자기는 계속 글을 수집한다고 했다. 되게 오랜 시간 공들여서 채집한 글을 가지고 단어에 맞는 멜로디를 찾아서 곡을 쓰더라. 김일두는 코드나 진행 같은 것을 창고에다 저장 해서 나중에 거기에 맞는 말을 꺼내 찾는 식이었고. 요한 일렉트릭 바흐 같은 전자음악 뮤지션은 음악 만드는 건 진짜 빠른데 멜로디를 만드는 것은 어려워 해서 내가 옆에서 노래 불러가면서 얹었다. 단편선은 동갑이고 옛날부터 친구니까 티격태격 싸워가면서 했고… (웃음) 일본의 오리지널 <신곡의 방> 팀이 서울에 와서 공연하기도 했다. 5번 트랙에 수록되어 있는 곡인데 그날은 내가 호스트를 하고 일본 호스트가 게스트로 나왔다. 통역을 해야하는 사회자도 두 명이 했다. 




Q: <신곡의 방>을 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을까?
이랑: 나의 <신곡의 방>은 대체로 남자 뮤지션들을 섭외했다. 아무래도 낯선 작업 방식이고 공연이다보니 그들도 되게 힘들어 했다. 왜냐하면 자기 방식을 다 까발려야 하고 원래 음악 만들던 방식대로 시간이 주어지거나 보여주는 것도 아니니까… 노래도 허접하게 나오고. (웃음) 나는 그런 걸 보여주는 것에 대해 상관없다. 오히려 보여줘야 사람들이 음악을 더 재미있어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뮤지션들마다 이런 것을 재미있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고, 되게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창작자의 영역으로만 놔두려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제일 아쉬웠던 점은 김사월 씨 말고는 여자 뮤지션하고 작업을 못했다는 점이다. 사실 <신곡의 방>에서는 멘트를 잘 해야했다. 워낙 토크 위주다 보니… 말이 막히면 안되니까. 나하고 세네 시간을 쉬지 않고 떠들 수 있으면서, 자기 음악을 서슴치 않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여자 뮤지션이 누가 있을까? 계속 게스트에 대해 고민했다. 개인적으로는 퓨어킴을 좋아하고 같이 하면 진짜 재미있을 것 같아서 섭외하고 싶었다. 근데 퓨어킴은 회사에 소속된 몸이라서 컨택하기 어려워서 결국 못했다.
원래 원칙적으로 <신곡의 방>은 시작하면 끝을 낼 때까지 계속 하는 거다. 세네 시간이든 그 이상이 됐든 간에. 만약 완성을 안 해도 된다는 전제를 깔아두면 그날 끝내기 힘들다. 김목인 씨도 처음에는 70-80프로 정도로 만들고서 힘들다며 집에 가려고 했다. (웃음) 사월 씨의 경우는 가사가 장난스러운 것에 대해 자꾸 고민하고 자기검열을 하더라. 그래서 결국 그날 완성을 못하고 나중에 사월 씨네 집에서 했다. (웃음) 

Q: 그렇게 12곡이 모여서 [신곡의 방 컴필레이션] 앨범이 만들어졌다. 들어보니 정말 재미있고 좋더라.
이랑: 앨범도 따로 나오고 정말 재미있는 이벤트였다. 근데 너무 힘들었고 이걸 다시 하기는 힘들 것 같다. 일종의 프로젝트 같은 것이라 생각해서 내 개인 앨범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CD로는 제작을 안 하기로 했고. 매 공연마다 그린 포스터 그림을 살리면 좋겠다는 박다함의 의견이 있어서 엽서로 발매하게 되었다. 

Q: 이후에 일본 원작팀과 교류가 있었나?
이랑: 내가 막 시작할 때쯤 일본 원작이 끝났다. 거기도 컴필레이션 작업물을 낸다고 해서 나보다 훨씬 일찍 작업물을 낼 줄 알았다. 근데 내가 끝냈는데도 1년 동안 아직 안 나왔더라. 나는 현장에서 만든 곡을 거의 가공 없이 모아서 앨범으로 만들었는데, 일본판은 공연 때 만든 것을 바탕으로 추가 녹음을 하고 믹싱과 마스터링까지 새로 다 했다. 문제는 일본판에 참여했던 한명이 결과물에서 자신을 빼달라고 했다는데… 그러면 애초에 <신곡의 방>이란 연간 프로젝트에서 트랙 하나가 빠져 버리는 문제가 생긴다. 그 일 때문에 티격태격 하다가 보니 시의성도 없어졌고 흐지부지 된 것 같다. 원래는 한국과 일본판을 합쳐 2CD로 내서 양국에 같이 발매하려고 했는데 아쉽게 되었다. 



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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