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6일 화요일

[인터뷰] 이랑 (2부) - 2016-12-06

이랑: 헬조선을 살아가는 이랑의 세계 (2부) BY 김종규 - 2016-12-06

*원문 링크: http://webzinem.co.kr/5648


이랑 2016년 9월 21일 ©jongkyukim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 

위 질문은 이랑의 곡 ‘신의 놀이’의 도입 가사다. 올해 들어 국내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부쩍 ‘신의 놀이’가 귀에 맴돈다. 한국에서 산다는 것이 마치 신의 장난스런 놀이처럼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게 된 탓일까. 

이랑은 참 다재다능하다. 그는 2012년 맥북 한 대로 녹음해서 만든 데뷔 앨범 [욘욘슨]을 발표하며 세상에 알려진 뮤지션이다. 만화가로서 <이랑 네컷 만화>, <내가 30대가 됐다>를 발표했고, 영화감독으로서 <유도리>, <변해야 한다> 등을 만들었으며, 최근에는 웹드라마 <출출한 여자>, <게임회사 여직원들>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다. 

올해 이랑은 음악가로서 바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6월에 발매된 정규 2집 [신의 놀이]는 신곡 10곡이 수록된 앨범으로 책과 음악 다운로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솔직하게 쓰여진 글과 더불어 있는 그대로를 노래하는 그의 노래는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의 음악팬들에게까지 큰 울림을 선사하고 있는 중이다. 또,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관객 앞에서 매번 다른 음악가와 즉석에서 곡을 만들었던 공연 <신곡의 방>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공개되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이랑이라는 ‘사람’이 무척 궁금했다. 지난 9월 21일 망원동 작업실에서 이랑을 만날 수 있었다. 1부에서는 음악가 이랑의 활동을 중심으로 다루고, 2부에서는 영화감독 이랑과 그 이외의 면면을 다루기로 한다. 





“영상을 만드는 이랑” 

Q: ‘신의 놀이’ 뮤직비디오를 제작 중이라고 들었다. 
이랑: 2년 정도 전부터 사전작업을 시작했다. 이 얘기는 지금 쓰고 있는 에세이집에 아마 실릴텐데… 22살 때, 그러니까 9년 전에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의 기억이 바탕이 되었다. 그때 좁은 주방에서 낮 11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을 했다. 냉장고를 열고 뒤에 있는 오븐을 열고 피자를 만들고… 그런 일을 계속 하다가 어느 순간 반복되는 동작의 무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로 어떤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서 카메라를 들고 영상을 찍곤 했다.
이번 [신의 놀이] 앨범 작업하면서 ‘평범한 사람’ 같은 곡이라든가… 그런 개별 인간들에 대한 관심이 들어간 곡들이 만들어지고 지난 생각들이 계속 디벨럽(develop)되었다. ‘나는 이런 춤을 추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일하면서 무슨 춤을 추나. 그런 것을 수집을 하자.’ 그렇게해서 시간 날 때마다 주변에 있는 다른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평소 일을 하면서 반복적으로 하는 동작을 도구 없이 마임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배틀을 잡거나, 빵을 만들고, 요리하는 모습… 과학자, 의사, 한복 디자이너, 여자, 남자를 만나면서 동작을 모았다.
그리고 작년에 쌀쌀할 때, 지난 뮤직비디오 ‘프로펠러’ 때 같이 안무를 짰던 친구와 그 동작들을 분석하면서 춤으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이번 앨범의 뮤직비디오를 ‘나는 왜 알아요’로 정하려고 했다. 내 생각에 ‘프로펠러’와 같은 네 박자고 춤으로 메시지를 넣기에도 잘 맞는 것 같았으니까. 근데 이번에는 세 박자로 해보고 싶다는 의견이 있었고, 마침 ‘신의 놀이’가 쿵짝짝 하는 왈츠 박자라서 좀 어렵지만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하길래 그걸로 결정했다. 안무 작업은 ‘프로펠러’ 때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랑 시간을 갖고 연습하고 해서 너무 재미있었다. 촬영은 끝났고 조금씩 편집하면서 만들고 있다. 11월 중에 나오지 않을까. (11월 10일 공개되었다) 

Q: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랑 씨는 일을 리드하는 스타일인 것 같다.
이랑: 17살 때부터 일을 했다. 잡지 페이퍼에서. 그때는 항상 애기고 어디서든 막내였다. 회사에 들어가면 언니들이나 현역을 제대한 오빠들이 많아서 그분들이 밥을 사줬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보고 다 언니라고 그러고 누나라고 그러고 있더라. 이제는 감독님이라고 부르고. (웃음)
이번에 밴드를 할 때도 어떻게 하지… 이러다가, ‘어차피 다 동생이고 이제 난 막내가 아니야, 나는 어른이야, 여기서는 리더야, 이떻게든 해보자’ 했더니 일이 잘 진행되고 편하더라. (웃음) 뮤직비디오 작업하며 무용수들이랑 같이 할 때도 고민하면서 시간을 끄느니 그냥 리드 해버리니까 훨씬 손쉬웠다. 특히나 이건 내 작업을 위해서 하는 거니까. 영상 작업 때는 스탭들 중에서도 어린 편인데 내가 결정을 해야했다. 역시 리드해보니 순탄하게 잘 진행이 되고 재미있었다.
어떤 때는 그런 점이 엄청 피곤하다. 왜 나는 항상 뭘 하자는 사람인가. 왜 내가 먼저 하자고 안 하면 아무도 안 하고 아무도 먼저 연락을 안 하고… 왜 그럴까? 그래서 피곤했을 때가 잠깐 있었다. 근데 그건 어차피 잠깐이고 나머지 시간에는 내가 다 연락해서 보자고 한다. 가끔은 나도 누가 먼저 연락해주고 끌어주었으면 할 때가 많이 있다. “이거 어때요?” 라고 누가 물어 봤으면… 근데 다시 생각해보면 어차피 다 내 작업인데 내가 안 하면 누가 해, 가 되는 거다. 

Q: 이랑 씨는 음악을 만들고 영상도 만든다. 둘 사이의 차이점이 있을까?
이랑: 나는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뭐든지. 혼자서 음악을 만드는 것처럼 영상도 처음에는 시나리오를 혼자 쓴다. 결국 시작할 때부터 혼자 작업하는 것은 똑같다. 이후부터 사람들이 많이 투입이 되는 것인데 되게 재미있다. 사람이 한 공간에 많이 모이면 그만큼 생기는 에너지도 많지 않은가. 콘서트를 크게 하는 뮤지션들이 엄청나게 많은 관중 앞에서 공연하는 것을 되게 좋아하는게 그래서인 거고. 그런 무대에 대한 부담감도 장난 아니지만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서 오는 반응을 즐기다 보니 무대의 맛을 못 잊는 것 같다. 그런 종류의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일이 끝나고 집에 오면 외롭고.
영상 작업은 공연이 아니다보니 사람들하고 얘기하고 지시하고 만들어 가면서… 진행될 수록 눈에 보이는 게 있는데 그런 것이 재미있다. 공동으로 하다보니 역할극하는 기분도 든다. 그러다 보니 예상치 못한 일도 많이 생긴다. 빨리 찍어야 하는데 누가 아프다던지, 지진이 났다던지, 누가 화가 났다던지, 누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던지, 하는 그런 변수들이 엄청 많다. 그때마다 빠르게 판단을 하고 다같이 상황을 바꿔 나가다 보면 에너지가 생긴다. 내가 잘하는 게 판단을 잘 하는 거다. (웃음) 




Q: 최근 공개된 <집단과 지성>의 예고편도 그렇고, 예전에 감독 연출한 <변해야 한다>, <유도리>, <주 예수와 함께> 등과 같은 작품들이 흥미롭다. 이랑만의 유머코드가 들어간 점이라던가, 지인들이 나온다던가. 작품끼리 어떤 연결점도 있는 것 같다.
이랑: 살아있으니까 자꾸 재미있는 생각이 나는데 계속 하고 싶고 만들고 싶다. 만드는 중에 제작비가 떨어지기도 하고, 투자를 받아서 상업물을 만들기도 하고… 그렇게 또 친구들하고도 이것저것 한다. <집단과 지성>은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영상 편집이 불가능해서 1년 동안 고생하며 이거저거 해보다가 지금 약간 해탈한 상태로 예고편만 작업하고 있다. 

Q: <집단과 지성>은 예고편만 공개된 상태인데 어떤 기술적인 문제가 생겼는가?
이랑: 찍는 도중에 슬레이트를 안 쳐서 영상의 녹음과 비디오가 맞지 않는다. 슬레이트를 안 치면 영상과 사운드 파일을 붙이는 부분이 지점이 안 생겨서 붙이기 어렵다. 영상파일이 한 트랙, 오디오 한 트랙만 있으면 붙일 수 있는데… 문제는 카메라를 3, 4대로 찍고 그래서, 그걸 다 찾아야 한다. 전체를 모으면 파일만 몇 백개가 되다보니 전문 편집기사를 찾아가도 어렵다더라. 그들도 한달 이상 노가다를 뛰어야 붙는다고 하고.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다.
일단 예고편에 쓸 것은 찾아서 그 부분만 소리를 찾으면 되니까 어떻게든 새로운 형태의 결과물을 생각 중이다. 이대로는 아무래도 본편이 나오기는 힘들어서 예고편 + 시나리오집 + 추가 정도의 구성으로 된 결과물을 생각하고 있다. 본편을 제외한 주변 구성만으로 사람들이 각자의 머릿속에서 본편을 만들 수 있게 하는 방식을 시도하려고 한다. 아예 결과물을 안 내는 것은 내 성질에 못 참는다. 어떻게든 완성을 하고 싶다. 

Q: 이랑 씨의 영상 작업에 영향을 준 인물은?
이랑: 기타노 다케시(Kitano Takeshi), 토드 솔론즈(Todd Solondz ), 래리 데이비드(Larry David)라는 미국 작가 겸 연출가이자 배우인 사람을 좋아하고, 루이스 씨케이(Louis C.K.), 우디 앨런(Woody Allen)도 좋아한다. <스튜디오 60>와 <웨스트 윙> 작가이자 영화 <소셜네트워크>의 각본가 아론 소킨(Aaron Sorkin)도 되게 좋아한다.
항상 작업할 때는 토드 솔론즈, 래리 데이비드, 루이스 씨케이 같은 풍으로 하고 싶다. 작가 본인이 출연해서 본인이 하고 싶어 하는대로 이야기를 풀고 하는 식이다 보니까 마음에 든다. 우디 앨런과 아론 소킨의 경우는 좀 더 고급 기술이 필요할 것 같다. 이창동 선생님의 경우는 그냥 겁나 리스펙트하고 있다. 하지만 선생님처럼은 내가 죽었다 깨도 못할 것 같다.

Q: 앞으로 이랑 씨 본인이 영상 작업에 직접 출연할 수 있을까?
이랑: 학교 다닐 때는 많이 했었다. 지금도 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포기해야 하는게 많다. 일단 카메라 뒤에 못 있으니깐 놓치게 되는게 너무 많아서 먼저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이번에 <집단과 지성>에 출연하면서 놓친 게 많다. 실수도 그렇고. 배우로 출연하면 감독으로서의 컨트롤을 할 수가 없으니까,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면서 관리해줄 수 있는 동료가 더 필요한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나도 여유가 생겨서 배우로 출연하면서 감독 역할도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Q: 예전에 했던 인터뷰 중에 “노래는 일기와 자기 치유에 가깝고 영화는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미래다”는 언급을 했었다. 지금은 음악과 영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이랑: 음악은 진짜 하고 싶을 때만 하고 안하고 싶을 때는 아예 안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야기를 짜는 것은 항상 하고 싶으니까, 그러다보면 더 하고 싶을 때가 있는 거라서, 나중에 어떤 노래를 만들 수도 있고 부르고 싶을 때가 생기겠지. 그런데 영화는 계속 하고 싶다. 이대로 40대가 된다고 했을 때 영화로는 하고 싶은 이야기나 만들고 싶은 장면 같은 것이 계속 떠오른다. 내가 구성한 이야기를, 그 세계를 시각 뿐만 아니라 청각 등 모든 감각들을 집결시켜 보여줄 수 있으니까. 반면 음악은 주로 청각에 의존하다보니 듣는 사람 각자가 떠올리는 이미지가 다르지 않은가. 내가 의도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영화와 각자의 감성에 젖게 할 수 있는 음악. 그 두가지를 종합하고 싶은데 어렵다. 




“말에 힘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Q: 원래 음악을 많이 듣지 않는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런가?
이랑: 음악을 누가 틀어주면 듣지만 스스로는 거의 안 듣는 편이다. 이동할 때 조금 기운이 떨어지면 멜론 같은 스트리밍으로 활기찬 아이돌 음악 같은 것은 듣는다. 최신 랭킹 1위부터 끝까지 다 듣고… 그치만 가지고 있는 음악은 거의 없다. 태양이랑 지드래곤이랑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라든가, 일본 친구들이 준 음악 몇 개 정도가 다고… 그것만 몇 년째 듣고 있다.
음악보다는 미국 스탠드업 코메디 음성 파일을 계속 듣는다. 좋아하는 코메디언의 음성 파일을 반복해가면서 듣고 길을 가면서도 듣는다. 되게 좋다. 미국의 코메디는 한국하고는 많이 다른데. 스탠드업은 코메디언 본인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자신의 생각이 들어간, 유머러스하게 포장해서 말하는 거라… 코메디언 본인의 인성에 따라 되게 차이가 많이 난다.
예를 들어서 티그 노타로(Tig Notaro)라고 하는 여자 코메디언은 유방암에 걸렸는데 절개 수술을 해서 양쪽 가슴이 없고 젖꼭지도 없다. 아예 아무 것도 없다. 아무튼 암에 걸렸다니까 갑자기 거의 만나지도 않았던 아빠와 오빠가 찾아온다. 근데 유방암이니 겉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만나러 와도 그냥 쇼파에 앉아 있을 뿐 아무 것도 해줄 수 있는게 없었다더라. (웃음) 또, 더이상 친구들이 스몰토크(small talk)를 안 한다고도 했다. 자기는 그 전과 똑같고 단지 암만 생긴 것 뿐인데 친구들은 “나 오늘 회사에서… 아, 아니야.” 라고 혼자서 화제를 정리하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아니야, 너는 암 걸렸잖아.” 라고 한다고. (웃음)
그런 식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반복해서 듣는다. 들으면서 다른 일을 할 수 있고… 책을 읽다보면 작가와 대화하는 느낌이 들지 않은가. 이 사람과 나와는 비슷하다, 같은. 스탠드업을 듣고 있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든다. 

Q: 언제부터 스탠드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나? 
이랑: 모르겠다. 스탠드업이란 장르를 알게 되면서부터 인 것 같은데… 아까 말한 래리 데이비드 같은 경우에 <사인펠드>라는 시트콤을 만들었다. 제리 사인펠드(Jerry Seinfeld)라는 스탠드업 코메디언이 본인으로 출연하는 시트콤인데 <프렌즈>가 나오기도 전이다. 그 시트콤은 시작과 끝에 항상 제인 사인펠드가 스탠드업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중간에는 그 스토리와 관련이 있는 시츄에이션 코메디가 나오고… 본인과 친구들이 겪은 일들이 <프렌즈>처럼 지나간다. 루이스 씨케이도 자기 드라마에 본인이 직접 짠 스탠드업을 넣는다.
미국은 코메디의 기본이 스탠드업이어서 거기서 많은 얘기를 푼다. 그러다 나중에 유명해지면 작가가 된다던지 연출가, 각본가, 배우가 되는 식이다. 이 사람들이 하는 스탠드업과 그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드라마, 영화, 시트콤 같은 게 다 연결 되어 있고 뻗어 나가다보니… 스탠드업을 계속 듣는 것만으로도 그 작가들에 대한 파악이 잘 된다.
처음에는 나도 이런 장르가 있는 줄 몰랐는데 미국 드라마를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 <투나잇쇼> 같은 토크쇼에서는 쇼 중간에 음악프로처럼 밴드를 소개하기도 하고 스탠드업도 나온다. 그런 쇼의 코너답게 새로 유명해지는 사람이 짧게 몇 분 정도 자기를 보여준다. 와, 이런 장르가 있구나… 그렇게 알게 되면서 좋아하는 사람을 계속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는 코메디언 두명이 말하는 것 위주로 하는 만담이란 장르가 있는데 그런 것도 재미있어서 찾아보기도 하고. 이런 것들은 우리나라에 없는 장르니까 재미있다. 




Q: 스탠드업이 다른 작업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가?
이랑: 9월에 김중혁 작가님의 신작 발간 행사*에 짧게나마 스탠드업을 하려고 한다. 그 책의 주인공이 스탠드업 코메디언으로 나오는 것도 있고 내가 좋아한다고 말도 많이 했기 때문에 하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뭐든 내 의도가 다 전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멜로디나 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도 말의 힘만을 가지고 전달이 되면 좋겠다. 그러니까 말을 하는 장르 자체로 어떤 극을 작업하고 싶다. 거기에 랩을 해볼까. 판소리, 아니면 악기 없이 노래를 해볼까. 혹은 영상으로 만들어 볼까.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볼까. 뭐,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없지만, ‘말에 힘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옛날부터 생각했었다. (*9월 29일 김중혁 작가의 장편소설 <나는 농담이다> 출간 기념 행사) 

Q: 노래든 스탠드업이든 나중에 아티스트로서 어떤 장소에 서고 싶은 곳이 있는가?
이랑: 그런 것은 생각 안 해봤다. 그냥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 아닌, 말 자체를 작품처럼 느껴지는 작업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걸 먼저 개발을 해야겠지. 개발도 하고 연습도 하고 그런 다음에 나중에 보여줄 수 있는거니까. 이번 김중혁 작가 행사에서도 스탠드업을 하다가 망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면 뭔가 더 필요하구나, 하고 생각하고 연습한 뒤 좀 더 길게 해보고… 그런 식이겠지. 이번에 친구 둘 앞에서 연습해봤는데 엄청 어렵더라. (웃음) 그냥 말하는 것과 코메디는 전혀 다른 건데, 연기도 들어가고 여러가지 설정도 들어가야 하니까 더 어려운 것 같다. 

Q: 10년 후에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이랑: 모르겠다. (웃음) 그런 것은 생각 안 해봤다. 우리 세대는 내일을 생각한다고 뭐가 되는 세대가 아닌 것 같다. 지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 생각한다. 우리 엄마, 아빠 때는 노력하면 저금하고 집도 살 수 있는 세대인 것 같은데, 우리 때는 노력해도 그게 안된다. 그러니 일단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칭찬 받아야 하고. (웃음) 우리보다 뒷 세대 때는 그게 더 심할 수 있겠지. 아무튼 그런 세대라서 40대가 되었을 때, 아무 것도 안되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20대 때,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한테 결혼하자고 했던 적이 있다. 남자친구는 준비가 되어야지, 뭐가 있어야 하지, 이랬고. 나는 그 말에 “야, 우리는 뭐가 없어, 기다릴 수 없어, 나중에 30대가 되도 없어, 지금 없는 것 그대로 30대가 되어도 없을 거라고 어차피 없으니까, 그냥 지금 하자” 이랬었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웃음) 


11월에 일본 투어를 했던 이랑 밴드 photo by Ryo Mitamura 


Q: 앞으로 한국에서 몇 개의 공연이 잡혀 있고 일본 투어도 있다. 그 외의 다른 활동도 염두해놓고 있는가?
이랑: 일이 많다보니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해야할 일이 더 많아서 못하고 있는게 많다. <집단과 지성>도 몇 개를 편집해서 시나리오집을 쓰고 있는데 편집실에도 가야한다. 영화사에 가서 미팅도 해야되는데 그러려면 시나리오라든가, 하다 못해 트리트먼트라도 써야된다. 그것 말고도 출판사와 네 권 정도 책이 계약되어 있어서 작업해야 한다. 여행 다니면서 쓰는 글을 모은 책도 내야해서 여행도 간간이 가야하고… 그것만 해도 시간이 모자란다. 근데 이번에 일본반이 나와서 홍보해야 하고 영상통화로 인터뷰를 하고, 따로 또 글을 쓰거나 사진 찍거나 하면서 거기에 시간을 쏟고 있다. 일본 투어 준비로도 합주를 하거나 셋리스트 짜다보면 또 뭐 했다고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그리고 연락해야 할 일도 되게 많다. 음반의 경우에 일본하고 한국 레이블이 따로 연락이 온다. 공연하자는 것도 박다함부터 시작해서 다른 사람들이 각자 연락을 해온다. 영화 쪽, 출판사, 편집실, ‘신의 놀이’ 뮤비 감독이나 무용수들, 또 다른 배우들에게도 오고 정신이 없다. 작업실에도 와야 하고. (웃음) 자다가 일어나서 핸드폰 알림 온 것들을 쭉 내려 읽고… 답변하면서 커피 마시고 담배 피는 것만으로도 두세 시간이 흐른다.
뭔가 내일은 뭐할까, 가 아니라 내일은 무조건 이걸 해야 돼, 다. 나는 회사를 안 다닐 뿐이지 일의 양은 되게 많다. 한 3주 정도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일만 하다가 딱 하루만 쉴 때도 있는데 그런 적이 되게 많다. 지금 해야되는 것만으로도 2년은 그냥 흘러갈 것으로 보고 있다. 

Q: 그렇게 해야할 것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다 잘 하고 싶은건가? 일에 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이랑: 나는 더 많이 하고 싶다. 아예 안 자고도 건강할 수 있으면 아예 안 자고 더 많이 하고 싶다. 일중독이라서. (웃음) 일하는게 재미있다. 뭐 다른 건 재미있는 게 없다. 할 수만 있으면 술 마시면서 일하고 싶다. 술 먹으면서 글 쓰고 춤추고. 기왕 놀거면 술 먹으면서 놀고 싶다.
얼마 전에 사격장에 가서 사격을 했는데 재미있었다. 9점을 네 발 쐈다. 10점짜리 한 발도 쏘고. 처음 해봤는데 되게 재미있었다. 그런 식으로 가끔 짧은 시간에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사격을 한다던가, 누구랑 섹스를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잠깐 기분 전환을 팍!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다 일을 한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게 좋다. 일을 좋아하는 타입 같다. 일을 어떻게든 다듬어서 끝내고 그것을 사람들한테 빨리 보여주려고 하는 시스템이 스스로 잡혀 있는 것 같다.
보통 작업을 많이 하면서도 안 보여주는 사람이 진짜 많지 않나. 나는 이상한 거라도 일단 보여주는 것을 좋아한다. 연예인처럼 꾸민 나를 보여주고 싶어한다기 보다… 작업을 보여주고 싶은데, 거기에 나를 적절히 이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심지어 고양이를 이용한다던지. (웃음)
근데 아직도 자기 작업을 공개 안 하려는 주변 친구들이 많다. 걔네들한테 아무리 보여달라고 해도 안 보여주길래, 처음에는 답답해 했는데 이제 와서 보면 그냥 나와는 성향이 다른 거 같더라. (웃음) 지금은 그냥 “넌 예쁘니까 할 수 있어. 존재 자체만으로도 잘 하고 있어. 돈 없어도 돼 내가 밥 사줄게. 대신 말 안 하고 죽지만 마라. 말은 하고 죽어라. 자살 하기 전에 꼭 얘기해라” 하고 말해준다. (웃음) 그러는 게 마음이 편해진다.
본인들도 어떻게든 잘 해보고 타파할 생각들을 하고 있을텐데. 내가 거기에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간섭 해봤자… 괜히 친구들 자존감에 상처주고 도움이 안되더라. 지금도 자기들이 가야할 방법을 찾아가는 모습들일텐데. 물론 나도 남이 얘기하면 안 듣는다. 까먹고. (웃음) 


[인터뷰] 이랑 (1부) - 2016-12-06

[이랑] 헬조선을 살아가는 이랑의 세계 (1부) BY 김종규 · 2016-12-06

*원문 링크: http://webzinem.co.kr/5598


이랑 2016년 9월 21일 ©jongkyukim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 

위 질문은 이랑의 곡 ‘신의 놀이’의 도입 가사다. 올해 들어 국내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부쩍 ‘신의 놀이’가 귀에 맴돈다. 한국에서 산다는 것이 마치 신의 장난스런 놀이처럼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게 된 탓일까. 

이랑은 참 다재다능하다. 그는 2012년 맥북 한 대로 녹음해서 만든 데뷔 앨범 [욘욘슨]을 발표하며 세상에 알려진 뮤지션이다. 만화가로서 <이랑 네컷 만화>, <내가 30대가 됐다>를 발표했고, 영화감독으로서 <유도리>, <변해야 한다> 등을 만들었으며, 최근에는 웹드라마 <출출한 여자>, <게임회사 여직원들>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다. 

올해 이랑은 음악가로서 바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6월에 발매된 정규 2집 [신의 놀이]는 신곡 10곡이 수록된 앨범으로 책과 음악 다운로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솔직하게 쓰여진 글과 더불어 있는 그대로를 노래하는 그의 노래는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의 음악팬들에게까지 큰 울림을 선사하고 있는 중이다. 또,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관객 앞에서 매번 다른 음악가와 즉석에서 곡을 만들었던 공연 <신곡의 방>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공개되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이랑이라는 ‘사람’이 무척 궁금했다. 지난 9월 21일 망원동 작업실에서 이랑을 만날 수 있었다. 1부에서는 음악가 이랑의 활동을 중심으로 다루고, 2부에서는 영화감독 이랑과 그 이외의 면면을 다루기로 한다. 




“신의 놀이”

Q: [신의 놀이]는 4년 만에 나온 앨범이다. 
이랑: 주로 2011년도에서 2013년도에 만든 곡들이다. 1집 [욘욘슨]을 낸 당시에는 바로 다음 해에 새 앨범이 나올 줄 알았다. 근데 앨범을 제작하는 소모임음반 측에서 일이 많다보니 계속 딜레이가 되었다. 나도 이러저런 일을 겪으며 노래를 새로 쓰기도 했다. 그러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와 ‘좋은 소식, 나쁜 소식’ 같은 곡도 나왔고. 

Q: [신의 놀이] 책 구성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글이 쓰여진 시기가 다 다른 것 같더라.
이랑: 책에 실린 글은 이전에 쓴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앨범을 CD 없이 내기로 정한 뒤, 가사집은 어른이 쓰는 손글씨처럼 러프한 느낌의 타이포가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근데 2집에 실린 노래는 반복이 별로 없고 아예 글처럼 느껴지는 것도 있어서 가사집이 점점 두꺼워졌다. 그러니 부클릿 두께에 욕심이 나더라. 가사가 많은데 기왕이면 글이 좀 더 있었으면 했다.
안 그래도 2, 3년 전에 한 출판사와 에세이집을 계약한 것도 있고 원래부터 글을 계속 쓰고 있긴 했다. 그 동안 모은 글을 소모임음반에 보여줬더니 “앨범에 같이 실으면 좋을 것 같으니 노래 내용과 맞는 글을 찾아보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출판사 측에서도 그에 동의했다. 그렇게 원고 중의 일부를 찾았고 그 과정에서 글을 새로 쓰기도 했다. 그러면서 단락 별로 글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지금의 배치대로 책이 완성되었다. CD는 음악의 흐름을, 책은 글의 흐름대로 읽으시면 좋을 것 같다. 

Q: 앨범 커버가 마치 장례식 영정사진 같이 보인다.
이랑: 어쩌면 유작이 될 수도 있고. (웃음) 애초에 시체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다. 소모임음반 사장님과 나는 이 앨범의 별명을 ‘이랑 자살 방지 앨범’이라고 부른다. 자살하고 싶을 때마다 노래를 부른 것도 있고, 이 앨범 내기 전에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심정을 표현하는 색깔로 검은색이 들어갔다.
현재의 커버 사진은 처음부터 커버용으로 찍은 것은 아니었다. 친구 중에 일본인 화가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에게 [신의 놀이] 앨범 커버로 쓸 초상화를 부탁하려고 샘플로 찍은 사진이다. 인디, 여성, 30대 등의 소재는 워낙 많으니까 기존의 앨범 커버 이미지에서는 벗어나야 했다. 필카로 러프하게 찍은 이미지나 무게 잡고 시커멓게 찍은 사진 같은 것은 이미 많이 소비되고 있고… 뽀샤시하고 예쁜 사진은 나한테는 안 어울리고. 그래서 어둡게 하되 까만 배경의 초상화를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친구는 정물화가다. 나는 이 친구의 작업물을 좋아하는데 오직 정물화만 그리고 인간을 그리지 않는다. 인간을 한번도 그린 적이 없다고 했다. 친구는 ‘사라지는 정물화’라는 연작을 그리고 있다. 예를 들어 테이블 위에 먹을 것과 여러 가지 집기들이 반투명인채 놓여 있는데 보고 있으면 되게 기묘한 느낌이 든다. 그런 인간을 그리지 않는 사람이 인간을 그리면 뭔가 기묘한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초상화 속 내 모습이 무슨 시체처럼 그려질 것이라 생각했다. 뭔가 딱딱하면서 생물이 아닌 듯한.
그런데 결과물을 보니 얼굴이 너무 닮은 것도 아니고 안 닮은 것도 아니고… 애매해서 포기했다. (웃음) 초상화는 친구에게 정식으로 구입했다. 그리고 처음에 찍은 샘플 사진을 아예 커버용으로 결정하고 비용도 다시 지불했다. 친구가 그린 그림을 커버로 쓰이지는 않아서 아쉽게 되었지만, 일본판 책에 그 친구의 다른 그림이 실리게 됐다. 결과적으로는 잘 된 것 같다. 


[신의 놀이] ©jongkyukim 


Q: [신의 놀이] 앨범에는 CD가 안 들어있다.
이랑: 지금 사람들에게 CD 플레이어가 없으니까. 일단 나부터도 없다. 일본에 가면 친구들이 CD나 DVD를 선물로 주는데 플레이어도 없고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노릇인데. (웃음)
얼마 전에 이런 것을 봤다. 한 온라인 음반 사이트의 댓글 중에 누가 “저는 이 앨범에 CD가 없다고 해서 안 삽니다” 이러더라. CD부심 같은 건가. 그러면 일본판을 사면 된다. 가격은 두배다. (웃음)
또 다른 일로는 앨범에 들어있는 온라인 다운로드 코드가 작동을 안 한다고 메일을 보낸 사람이 있었다. 다운이 안되니까 음원을 보내달라는 얘기인데… 그런 경우에는 우리 쪽에서 코드가 작동되는지 직접 확인해야 하니 알려 달라고 한다. 개별 코드니까. 근데 확인해보니 없는 번호인 거다. 지어서 보낸 거고 앨범도 안 샀으면서 뻥친 거다. 그런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그런 머리 쓸 시간에 그냥 앨범 사고 말지. (웃음) 

Q: 나중에라도 [신의 놀이] 한국판을 CD로 낼 생각은 없는가?
이랑: CD보다는 LP로 내고 싶다. LP가 큼직하니 앨범 커버도 크게 나오니까 소장하기에도 좋을 것 같고. 만약 LP로 나온다면 지금의 곡 순서를 좀 바꾸고 싶다. 일단 LP 제작은 생각 중이다. 

Q: 데드라인이 없이 앨범 작업을 했다고 들었는데 실제로도 작업 기간이 길었나?
이랑: 가라지밴드(GarageBand)로는 훨씬 전에 이미 다 만들어져 있었다. 데모곡 중에 [욘욘슨] 때부터 있던 곡이나 공연 때마다 부르던 곡도 있었고. 그런 곡들 중에 추려서 레코딩 작업을 다시 했다. 나는 스튜디오 녹음 경험이 없기도 하고 소모임음반 사장님은 사장님대로 본업이 있어서 한두 달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이런 식으로 정해진 일정 없이 작업했다. 어느날은 드럼만 하루만에 녹음을 다 하고 또, 한 달 있다가는 베이스를 하고, 두 달 뒤에는 첼로를 다 하고, 그 다음에 나 혼자 다 하고… 이런 식이었다. 되게 띄엄띄엄했다. 녹음이 끝나고 믹싱도 그런 식으로 했다. 다들 시간 맞추기도 어렵다보니… 나도 처음에는 안달복달 하다가 나중에는 해탈한 채로 지냈다. 그러면서 내 개인 작업도 해야했고. 




Q: 기간이 길어서 많은 일들이 있었을텐데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사건이 있을까?
이랑: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게 앨범을 진행했다. 그러다 중간에 있었던 일 하나가 있다. 그때 내가 29살이었으니 2년 전 일이다. 되게 초조하더라. 30대에 대한 두려움 같은게 있어가지고… ‘이제 어리지 않다’, ‘이제 내가 다 책임을 져야할 때가 다가온다’, ‘이제 내가 실수해도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 같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아직 실수를 할 수 있을 때, 욕 먹어도 괜찮은 나이에 2집을 내고 싶었다. 애초에 음악도 다 있었으니까. 뭐 이때까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아직 없었지만.
27살에 1집을 냈으니 당장 28살에 2집이 나올 줄 알았다. 근데 29살이 되었는데도 안 나왔고… 그래서 사장님네에 가서 울었다. “나 진짜 서른 살에 앨범 내기 싫어, 서른 살 싱어송라이터는 싫단 말야”면서. (웃음) 그때 나는 고정관념인지, 선입견에 빠져서 30대가 되면 너무 어른 같아서 정말 실수하면 안될 것 같더라.
그때 우리 엄마는 내게 전화만 하면 “너 빨리 영어선생님 되라” 같은 이런 얘기를 하셨다. (웃음) 속된 말로 취미생활이라고 부르는 이런 일을 30대에도 하는 것이 가능할까,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를 들어 보면 “또 하루 멀어져 간다…” 이런 가사도 있지 않나. 괜히 사람을 힘들게 만들고 불안하고 무섭고 책임감을 느끼게 하고 말이다. (웃음) 그런데 막상 30대가 되니까 아무 생각도 없다. 그냥 살면 되더라. (웃음) 

Q: 이번 앨범에 첼로의 비중이 상당한데다 앨범 전체적으로 연주가 훌륭한 것 같다.
이랑: 데모를 만들 때 혼자서 기타 치는게 너무 재미 없었다. 1집 때만 해도 코드를 두세 개 밖에 몰랐었으니까. 코드를 하나 알게 될 때마다 기뻐서 노래를 하나 씩 만들었다. “우와, 이 소리 신기하다” 라며. 그러다 한계에 부딪혔다. 거기서 실력이 더 올라가려면 코드를 더 배우고 핑거링 같은 테크닉 연습을 엄청 해야하는데 문제는 손이 너무 아팠다. 정코드인 A, C, E, F, G 코드가 끝나서 할 게 없으니 더욱 기타를 치기 싫었다. 그래서 가라지밴드로 음악 만들면서 직접 연주를 안 하고 가상악기를 가지고만 만들었고. (웃음)
소모임음반에서 데모를 듣더니 이건 진짜 악기가 들어가면 좋겠다, 해서 세션을 섭외했다. 실제로 악기가 들어가고 사람이 직접 연주하니까 엄청나게 좋더라. 합주를 시작하면 진짜 앨범처럼 연주가 들리는데… 나는 혼자 노래하고 기타 치느라 정신이 없고. (웃음) 그러다 중간에 누가 틀리면 그때서야 옆에서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했는데 그런 점도 너무 신기했다. (웃음) 그런데 워낙 사람 모으기가 힘들지 않나…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전자음악을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번에 일본 투어를 준비하는데 멤버들의 비행기 티켓을 구하는 것조차 예상했던 상황하고 너무 다르기도 해서. 

Q: 1집에 이어 2집에도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를 거론했다. 관련해서 곡도 만들었고.
이랑: 커트 보네거트를 진짜 좋아한다. 그 전에도 소설 같은 것을 많이 읽었지만 다들 읽는 것들… 무라카미 하루키라든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작가들을 읽었다. (웃음) 대학생이 되어 뭘 읽을까 고민하던 차에 그 당시에 알게 된 한 영화 감독이 커트 보네거트를 추천해 주었다. 나중에 커트 보네거트의 책 중에 하나를 사서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모두 읽었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취향을 갖게 된 것 같다. 처음에는 전형적인 소설 형식이 아니라서 머리속에 잘 안 들어왔는데, 읽고 또 읽으니까 새로운 레이어가 이해되고 더 재미있더라. 좋아하면 좋아할 수록 좋은 작가다.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니까 2006년에 처음 읽은 건데, 그 당시에는 커트 보네거트가 아직 살아 계셨다. 책을 읽고 너무 좋아해서 ‘나는 무조건 미국에 가서 만날 거다’며 내 나름의 목표를 잡았었는데… 얼마 안 있어 돌아가셨다. 그때는 한참을 목표를 잃은 기분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최근에 데이비드 실즈(David Shields)를 좋아하는데 이 분은 부디 안 돌아가셨으면 좋겠다. 

Q: 학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고등학교를 일찍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봤다고 들었다.
이랑: 나는 고등학교에 안 간 것이 인생 최고의 자랑이다.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중학교부터 안 가고 싶다. 중학교 때는 자퇴라는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졸업 후 친구 중 한명이 고등학교에 안 가고 검정고시 치른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그런 선택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안 말해줬으니까.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는 시험을 치르고 들어가던 때인데 나는 이미 들어갈 학교가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이거 첫날부터 안되겠더라. (웃음) 바로 엄마한테 가서 계속 조르고 울고 불며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해서 결국에는 안 갔다. 

Q: 지금보면 고등학교에 안 간 것을 이득으로 보는가?
이랑: 개이득이었다. (웃음) 시간도 진짜 많고. 지금은 하루가 허겁지겁 가는데 그때는 여유만만해서 수영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보고 걸어다니고 산책하고 그랬다. 시간도 많고 체력도 좋았었다. 책을 되게 빨리 읽는 편인데 그때는 하루에 6권도 읽었고 소설책은 한두 시간이면 다 읽었다. 시리즈물은 물론이고 공상과학물이라던가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해리 포터>… 그런 걸 다 읽으면 무슨 이상한 실용서도 봤고 채팅도 많이 했고. (웃음)
지금은 너무 바쁘다. 하루가 너무 짧다. 일단 오후 세 시, 네 시에 하루를 시작하니까. 잠은 오전 다섯 시에 잔다. 엄마가 그렇게 살면 암에 걸린다고 했다. 내가 암 걸릴 때쯤에 안락사가 허용되겠지. (웃음) 

Q: 이번 [신의 놀이] 앨범에서 죽음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만약에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죽는다면 어떻게 죽고 싶은가?
이랑: 가능하면 안락사가 되는 나라에서 죽고 싶다. 원래 일찍 죽고 싶었는데 최근에는 그래도 50살 전까지는 살아보기로 했다. 조금 아프기는 해도 그때까진 어떻게든 일도 할 수 있고 살만할 것 같고. 그런 뒤에 죽고 싶다.
그게 안되면… 얼마 전에 친구랑 이야기하던 중에 나온 이야기인데, 안락사할 돈으로 차라리 영국 같은 나라의 비싼 호텔의 스위트룸 같은 곳을 빌려서 인사불성 될 때까지 술과 약에 취해서 뛰어 내리자고 했다. (웃음) 뛰어내린다는 자각이 없을 때까지, 취해서… “뛰어 내리자! 아으, 좋다” 이러면서. (웃음) 자살하는 것에 가장 큰 걸림돌은 아픈 것에 대한 공포니까… 아무튼 뭐, 그런 얘기를 했었다. 

Q: 다른 인터뷰 때도 죽음에 관한 질문을 했을 것 같다.
이랑: 한 것 같다. 노래에서도 다 죽는 얘기만 하니까. [신의 놀이]를 내기 직전에 한 친구가 자살했다. 얼마 뒤 했던 인터뷰에서 “어떻게 죽고 싶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친구가 죽은지 얼마 안되었을 때여서 그 말에 혼자 막 울었다. 친구가 말도 안하고 자살하니까, 안타깝고 아쉽고…
나도 자살하고 싶지만 안 하는건데. 만약 나한테 얘기했으면 내가 얼마나 욕하면서도 살고 있는지 말해주면서 그냥 재미있게 지내자 같은, 그런 얘길 하면 좋았을텐데. 앨범을 빨리 내서 그 친구가 읽었더라면 이랑도 진짜 힘든가 보다, 했을텐데. 그런 말도 할 겨를도 없어가지고… 내가 그러고 있으니까 인터뷰어가 결국 그 다음 질문을 못 하더라. 


일본판 [신의 놀이] – 이랑 트위터 캡쳐 


Q: 얼마 전부터 일본쪽 소식을 많이 올리길래 일본에 가 있는 줄 알았다.
이랑: 마침 추석 연휴 즈음해서 [신의 놀이]와 [욘욘슨]이 일본에서 동시 발매되었다. 이미 그 전에 일본에서 한 인터뷰도 앨범 발표와 함께 공개가 되었다. 계속 정보가 뜨니까 무슨 일본에 있는 것 마냥 된 것 같다. 

Q: 일본에서 앨범 반응은 어떤 것 같은가?
이랑: [신의 놀이]가 빠른 속도로 팔린다고 들었다. 일본에 있는 친구들에게서도 [신의 놀이]가 품절되고 반응이 좋다고 연락이 왔다. 이번에 공개된 것 중에 일본의 한 매거진인 <바이스(Vice)>에서 한 인터뷰가 있다. 처음에는 <바이스>가 일본 내에서도 힙한 느낌의 잡지라서 질문이 평범할 줄 알았다. 근데 인터뷰를 하셨던 분이 그쪽 음악계에서 꽤 활동했고 나이도 있으셔서 그런지 능숙하게 이야기를 잘 풀더라. ‘Who are you?’ 라는 섹션에 실렸는데, 코너 자체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고 인터뷰하는 아티스트를 알려야겠다는 사명감도 느껴졌다. 그러면서 인간에 대한 관심도 있어서… 뭔가 통하는게 있었다.
대체로 처음 만난 일본 사람한테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헬조선 같은 단어를 쓰면 깜짝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한다. 대부분 괜히 미안해하고 이상한 죄의식이 사로잡혀서 땀을 뻘뻘 흘리고 그런다. 그런데 <바이스>의 인터뷰어는 그런 이야기들이 왜 필요한 것인지 잘 풀어서 이야기가 되게 잘 나왔다. 인터뷰에서 나는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며 식민지라던가 군대 문화, 헬조선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내용이 검열 없이 다 나가서 여기저기서 적나라하고 솔직하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그 내용 때문에 현지에서도 난리가 났다고. 

Q: 읽어보니 흥미로운 인터뷰였다. 한국에서 했던 인터뷰들하고는 성격이 많이 다른 것도 있고.
이랑: 일본에 가서 인터뷰 할 때마다 그 이야기는 다 했다. 왜냐하면 앨범 이야기를 하게 될 때 “왜 그런 음악을 만드냐”, “왜 이런 글을 쓰냐”고 질문을 하니까. 당연히 지금 살고 있는 상황이나 사회 현상 같은 것들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한국 매체와 인터뷰를 하면 최근 제일 많이 화제가 됐던 페미니즘 같은 이슈 쪽으로 흐르지 않나.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쪽으로 말한 거다. 뜬금없이 “메밀국수가 먹고 싶어서 만들었어요” 이럴 수는 없고. (웃음)
애초에 사회란 게 너무 어렵고 복잡한 거니까. 한국 사회가 왜 어려운지 설명하려면 군대문화, 군사정권, 식민지, 한국전쟁… 이런 키워드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나라에서 자란 사람이니까 이런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인터뷰를 시작했지만 가면 갈 수록 진지해져서 있는 그대로를 다 말했다.
내 생각에 일본의 특징은 민감한 이야기를 잘 말하지 않는다. 서로 예의를 지키고 피해를 주지 말자는 인식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나라라서 다이렉트로 말을 잘 안 한다. 정치적인 것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젊은 사람은 더 그렇다. 우리나라 젊은 사람은 농담으로라도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나 대통령을 별명으로 부르고…
아무튼 일본에서의 인터뷰 이후에 파급력이 굉장했다. 찾아보니까 울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도 헬이에요” 하면서 너무 공감했다, 놀랍다, 라는 의견도 보였고. 힙해보이는 매거진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니까 깜짝 놀랐다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내 앨범이 잘 팔린다고 한다. (웃음) 일본 쪽 레이블 사장님도 그 인터뷰의 반향이 대단하다고 했다. 

Q: [신의 놀이]를 읽어보니 일본에 자주 가는 것 같았다. 어쩐지 현지 문화에도 익숙해 보인다.
이랑: 한국에서 [욘욘슨]을 내기 전에 투어를 갔었다. 1년에 두세 번 정도 간다.
일본 음반사의 특징은 발표일에 비해서 앨범 제작을 훨씬 일찍 진행을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본 제품이 나오자마자 바로 파는데 일본은 만들고서 한두 달 정도는 홍보만 한다. 나의 경우는 두달까진 아니었지만.
앨범이 나오면 기자나 평론가 같은 음악 관계자들에게 1차적으로 홍보용을 뿌리고 보도자료 돌린 뒤 인터뷰까지 다 끝낸다. 홍보 메일로는 지금 앨범이 어느정도까지 제작 진행이 되고 있고… 그런 식으로 앨범을 팔기 전에 어느 정도 홍보 기간을 갖는다.
공연의 경우, 한국에서는 주로 “이번 주 일요일에 공연이 있습니다” 라며 SNS로 홍보한다. 근데 일본은 두세 달 전부터 홍보를 한다. 20명 정도 모이는 인디 뮤지션의 공연이라도 훨씬 전부터 홍보한다. 2달 전에 공연 전단지를 만들어서 클럽마다 비치하고 공연 보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계속 뿌리고… 그런 홍보 활동이 일반적이다.
일본은 갑작스러운 것을 진짜 안 좋아한다. 친구랑 “오늘 만나자” 하는 것도 안된다. 약속은 그 전부터 미리미리 해야한다. 친구든 연인이든 마찬가지다. 간섭하고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니까. 말로는 안 그러지만 막상 그 상황에 닥치면 들어주지 않는다. 물론 이런 예약문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본인도 있다. 서로 계속 거리를 유지하면서 남에게 피해를 안 끼치려고 하는 분위기를 지겨워 하는 일부 일본 사람들은 한국에 오면 되려 편안해하고 좋아하는 것 같더라. 

Q: 한국하고 비교했을 때 공연문화 쪽은 어떤가?
이랑: 일본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일본 음악팬들은 한번 좋아해주면 끝까지 좋아해준다. 공연을 거듭할 수록 처음부터 좋아해주는 팬이 계속 있고,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서 점점 불어난다. 그래서 공연 하는 입장에서는 갈 때마다 안심을 하고 간다. 한국하고 비교하면 절대 씬의 규모도 다르다.
한국의 경우, 정량이 있으면 계속 새로운 사람들로 교체되는 형국이다. 우선 인디 음악을 좋아하는 층이 한정되어 있고, 그 사람들이 한창 1, 2년 정도는 공연을 보러 와도 나중에서는 바쁘던가 흥미가 떨어져서 안 온다. 그렇게 빈 자리를 새로운 사람들이 유입되어 채우는 식이다. 그래서 관객이 몇 명이나 올 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작년에 했던 <신곡의 방> 공연에서는 들어오는 인원 수가 한계가 있어서 예매를 빨리 풀었더니 당일이 됐는데도 안 오는 경우가 있었다. 작은 공연장에서 20명 정도만 모아놓고 하는 거라서 10명이 안 오게 되면 엄청나게 썰렁해진다. 그렇다고 새로운 관객이 당일 공연에 결정해서 오는 것은 힘들고.
나중에는 적당한 요령을 찾았다. 예매를 받을 때 애초에 들어올 수 있는 관객수보다 좀 더 받은 다음에 마감한다. 그러면 그 중에서 한 8명 정도는 안 온다. 그 사람들이 빠지면 결과적으로는 딱 적절한 수의 관객이 모인다. 소규모 공연장이 꽉 찰 만큼. (웃음) 공연이란게 인원을 장소와 딱 맞춰서 받으면 안된다. 변수는 항상 있으니까. 이것도 일본 애들한테 노하우를 들었다. (웃음)




Q: 2집 [신의 놀이]와 1집 [욘욘슨]. 한국판과 일본판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랑: 비슷한데 다르다. 일본판은 한국판과 비슷하면서도 달라야 하니까 디자인에 대해 일본측 레이블과 심도 깊게 이야기를 했다. 영상 통화도 하면서. (웃음)
일단 일본판 [신의 놀이]는 케이스 안에 책과 CD가 들어있는 구성이다. 책은 일본판답게 왼쪽으로 펼쳐지며 글은 세로로 쓰여져 있다. 또 한국판에는 없는, 아까 얘기한 일본인 화가 친구의 삽화가 수록되어 있다. 삽화가 인쇄된 종이는 일반 종이와 다르게 투명하고 글자도 비치는 특수한 재질이다. 또, 원래는 음반이 책에 바로 붙은 형태로 나오려고 했는데 번역을 해서 붙여보니까 책이 너무 두꺼워졌다. 근데 두께가 감당을 못해서 따로 케이스에 책과 CD가 들어있는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이렇듯 패키지에 시간과 공을 많이 들였다. [욘욘슨]의 가사집은 내가 직접 손으로 썼는데 힘들었다. (웃음) 한자를 몰라서 컴퓨터 모니터에 크게 띄워 놓고 글씨를 한자 한자 손으로 따라서 그렸는데 진짜 고생했다. 가사집에 실린 그림도 새로 다시 그렸다. 

Q: 한국판 못지 않게 일본판 앨범들도 소장가치가 높은 것 같다.
이랑: 지금 당장 한국에서는 일본판을 정식 수입할 계획이 없고 아마 11월 쯤에나 한다고 하더라. 일단 한국판을 좀 더 팔아야 하고. (웃음) 근데 일본판의 가격이 싸진 않다. 일본판 [신의 놀이]는 무려 2500엔이다. 또, [욘욘슨] 일본판은 2000엔이다. 가격으로 치면 2배다. 나중에 국내에서 역수입한 일본판을 사려면 그보다 훨씬 더 값을 치뤄야할 거다. 한국은 CD가 만원을 넘으면 비싸다고 생각하니까… 아무래도 일본판은 패키지에 공을 많이 들인 게 있어서 한국판에 비해 비싼 것 같다. 

Q: [신의 놀이]가 일본에서도 발표되고 반응이 워낙 좋다니까 공연을 할 것 같은데.
이랑: 투어를 하기로 되어 있다. 11월 18일부터 29일까지 총 9번 정도 있다. 앞서 6번 정도는 나와 첼리스트 이혜지만 가고 도쿄와 간사이 지방에서 하는 두 번의 큰 공연 때는 밴드 셋으로 갈 예정이다. 밴드 멤버까지 전부 5명이다. 지금 비행기 티켓을 사고 있다. 나와 첼로는 티켓을 샀고 이제 후발대의 티켓을 사야한다. 투어 준비를 되게 빨리 했는데 두 달 전부터 밴드 연습하고 포스터 이미지를 준비하고 셋 리스트도 보냈다. 한국 공연을 위해서 준비하는 게 아니다. (웃음) 

Q: 오히려 한국에서는 이랑 씨가 더이상 앨범을 내지 않는다고 해서 난리였다. (웃음)
이랑: 미스 커뮤니케이션 같은 게 있었다. 소모임음반에게서 앞으로의 앨범제작이 불투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음악보다는 원래의 본업을 하신다고 한다. 예전 [욘욘슨]이 나오기 전의 나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뮤지션이었다. 그때 소모임음반 사장님은 이랑의 음악이 너무 좋으니 사비를 털어서라도 앨범을 내야겠다고 했었다고. (웃음) 그만큼 잘 되긴 했지만 그럴수록 일은 점점 많아졌고 바빠졌다. 음악 제작만 해서는 먹고 살 수 있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소모임음반이 더이상 앨범을 안 만든다니까 나도 어찌 될지 모르겠다,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한 말이었는데… (웃음) 그렇게 일이 커졌다. 이미 보내진 보도자료는 어쩔 수가 없고 현재 웹사이트의 앨범 소개에서는 그 내용이 삭제되었다. 이 얘기는 아직도 인터뷰 때마다 물어본다. (웃음) 물어보면 음악을 안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음악을 안 만든지 오래되기도 해서. 


8월 20일 벨로주. 첼리스트 이혜지와. ©jongkyukim 


Q: 8월 20일에 아오바 이치코(Aoba Ichiko)와 스킵스킵벤벤(skip skip ben ben)의 내한 공연 때 오프닝을 섰다. 이랑 씨가 [신의 놀이]를 발표한 후 공식적인 첫 공연날이다. 그날 이랑 씨의 입으로 앞서 언급한 세상을 떠난 친구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신보를 냈는데도 왜 한동안 공연하지 않겠다고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랑: 그날 공연 때 입었던 친구의 자켓은 지금 내 작업실 의자에 걸쳐 있고… 그런 여러가지 신상에 일이 있어서 원래는 그 공연을 취소하려고 했다. 근데 그 공연의 기획자가 친구들이다. 한국 관객들은 아오바 이치코와 스킵스킵벤벤에 대해 아직 잘 모르니까 뭔가 홍보를 해야했다. 전에 대만에서 공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 스킵스킵벤벤이 오프닝을 서줬던 경험도 있었고… 그런 경우에 현지 아티스트가 서포트를 해줘야 하지 않나. 내가 취소하면 티켓 환불이 들어오니까. 친구들이 “상황이 안 좋은건 알고는 있는데 미안하지만 그래도 해주면 안되냐?” (웃음) 라고 해서 그냥 공연을 했다. 

Q: 그날 이랑 씨의 오프닝 공연은 엄청난 임팩트가 있었다. 공연 후반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를 불렀다. 7분에 육박하고 반복도 없는 곡을 쉬지 않고 어렵지 않게 부르는데 어떻게 하면 그리 할 수 있나? 
이랑: 공연이 너무 엄숙하지 않았나? (웃음) 나중에 이날 후기들을 찾아보니까 운 사람도 있었다던데.
아무튼 7-8분 동안 노래 부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원래 기교나 가창력을 요구하는 곡이 아니다 보니. 처음에는 일기를 쓰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노래로 만들어지면서 호흡이나 억양 같은 것들을 조정해가면서 가사를 만든다. 혼자 노래를 부르다가 여기서는 말을 바꿔야겠다, 싶으면 바꾸고. 쭉 가다 발음이 꼬인다면 여기서는 무조건 쉬고, 혹은 어떤 부분에서는 숨을 참고 이어가는 식으로… 설계를 하듯이 곡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오랫동안 만든 곡들은 완전히 숙지가 되어 있는 상태라서 가사를 잊어먹지 않는다. 일단 노래를 시작하기만 하면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전체적인 덩어리’가 곡 끝날 때까지 다 나온다. 그냥 저절로 노래가 나온다고 보면 되겠다. 대신에 공연장에서는 당시의 감정 같은 것들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Q: 마지막에 예고없이 2곡을 더 이어서 노래해서 깜짝 놀랐다. 
이랑: 새 앨범을 내고 처음 하는 공연이다보니 혹시라도 앵콜이 나올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야했다. (웃음) 첼로랑 연습하면서 셋리스트를 짤 때 마지막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를 한 뒤에 ‘나는 왜 알아요’하고 ‘웃어, 유머에’를 바로 붙여서 부르기로 했다. 세 곡을 연이어 붙이면 하는 사람도 힘들고 듣는 사람도 힘드니까. 아무도 앵콜을 못하게 분위기를 확 죽여버리고 집에 가자, 며. (웃음) 근데 세 곡을 연달아 하다보니 목말라 죽는 줄 알았다. (웃음)
원래 ‘나는 왜 알아요’하고 ‘웃어, 유머에’. 그 두 곡은 만들 때부터 안 끊어지게 붙어있는 곡이었다. 근데 막상 [신의 놀이] 앨범 트랙 리스트를 짤 때 그 둘을 붙였더니 중간 곡들이 너무 애매해지는 거다. 흐름이 다 무너진다고 해야하나. 상대적으로 조용한 곡들이 많은 것도 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왜 알아요’하고 ‘웃어, 유머에’를 떼어 놓고 1번부터 5번을 A면, 그 외 나머지들을 B면. 이런 식으로 짰다. (웃음) 아무튼 원래 의도대로라면 ‘나는 왜 알아요’가 끝난 뒤 바로 ‘웃어, 유머에’가 나와야 한다.
‘웃어, 유머에’의 데모 버전은 초등학교 애들하고 음악 녹음을 같이 해서 만들었다. 처음에 애들이 영어단어 laughter를 “l, a, u, g, h, t, e, r.” 라고 한 글자 씩 말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짝짝짝 친 뒤 “하하하…” 하고 시작하는 거였다. 근데 애들이 박수를 치면 칠 수록 흥분해서 박자가 더 안 맞아서… 그것 자체로도 재미있어서 넣고 싶었는데. (웃음) 지금은 비공식 음원이 되었으니 나중에 사운드클라우드 같은 데다 올려 놓을지도 모르겠다.




Q: 그날 공연에서 굉장한 울림을 준 곡으로 ‘환란의 세대‘가 있었다. 어쩌다보니 [신의 놀이] 앨범에는 수록이 되지 않은 곡이라고 들었다. 그에 대한 일화가 있는가?
이랑: 원래 내가 만든 노래가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감을 잘 잡는 편이 아니다. 일단 만들고 싶어서 만들긴 하지만 스스로 프로뮤지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다보니 기왕이면 나를 아는 사람이 평가해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동안 곡을 만들면 소모임음반 사장님에게 바로 바로 보냈다. [욘욘슨] 때는 처음이었으니까 보내면 금방 리액션이 왔는데, [신의 놀이] 할 때 쯤에는 받고서 “어, 나중에 볼게” 하고 그러다 까먹으시곤 했다. (웃음)
아무튼 ‘환란의 세대’가 안 실린 것은 나름의 사정이 있다. 작년에 나는 매달 1번의 공연 마다 한 곡씩 만드는 <신곡의 방>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제일 마지막에 만들어진 ‘환란의 세대’를 끝으로 종료했다. 곡을 만들고 나서도 이게 특별히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사장님에게 메일을 보냈고 그러면서 다른 한 곡도 같이 보냈다. 문제는 여기서 뭔가 오해가 있었다.
사실 <신곡의 방>이 끝나고 그 바로 다음날에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소설을 읽는 10가지 방법’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좋아하는 소설가를 소개하는 코너였기에 커트 보네거트의 책 얘기를 했다. 거기서 나는 “마침 어제 <신곡의 방>이라는 프로젝트를 끝냈는데 제가 노래를 참 쉽게 만들기도 해서 여러분들께 한번 보여 드리겠다”며,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친 뒤 거기 모인 사람들과 함께 즉석에서 15분 만에 노래를 만들어서 녹음했다. 그게 [신의 놀이] 앨범에 수록된 ‘좋은 소식, 나쁜 소식’이다. 나는 평소대로 어제랑 그제랑 곡을 만들었으니까 한번 들어보시라고, 사장님에게 ‘환란의 세대’와 같이 해서 메일로 보냈다.
그런데 그 멘트를 오해하신 거다. 나는 어제랑 그제에 한 곡씩 만들었다는 의미로 메일을 보냈는데, 사장님은 내가 어제랑 그제에 걸쳐서 한 곡을 만들었다는 줄 알았던 거다. 어차피 메일 두 개가 중복이니까 먼저 온 메일은 안 건드려도 된다 생각하신 거고. (웃음) 바로 사장님에게서 ‘좋은 소식, 나쁜 소식’을 앨범에 넣자는 회신이 왔다. ‘그럼 환란의 세대는?’ 따로 피드백이 없길래 아쉽지만 이번 앨범에 안 넣으려나 보다 했다.
나중에 [신의 놀이] 앨범 디자인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신곡의 방>의 결과물인 컴필레이션 앨범이 먼저 나와서 사장님에게 들려줬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다가 마지막 ‘환란의 세대’에서 깜짝 놀라더라. 전후사정을 알게 된 뒤에 사장님은 “아, 이거 앨범에 넣어야 되는데, 어떻게 하지. 다시 만들까?” 했다. (웃음)
<신곡의 방> 때 만든 ‘환란의 세대’는 다른 곡들과는 다르게 아직도 까먹고 잘 안될 때가 있다. 워낙 즉흥적으로 만든 곡이라 가사 숙지가 잘 안되기도 하고… 녹음 할 때도 가사를 보면서 했다. 지난 공연 때는 혹시라도 실수할까봐 팔에 가사를 다 적었다. (웃음) 첼로랑 같이 한 두 테이크 밖에 안 했었고, 곡의 수정도 별로 안 했다. 근데 라이브 때는 약간 다르게 하거나 실수를 해도 되니까 편하게 할 수 있어서 좋다. 


[신곡의 방 컴필레이션] ©jongkyukim


“신곡의 방” 

Q: 한 달에 한 번 다른 뮤지션들과 한 곡씩 만드는 <신곡의 방>은 어떻게 하게 된 것인가?
이랑: 부담도 있었지만 재미있게 끝냈다. 일본 원작의 포맷을 똑같이 가져왔다. 일본 원작은 호스트가 남자고 게스트로 출연하는 뮤지션은 격월로 남녀가 바뀌어서 나온다. 이번 달은 남자, 다음 달은 여자, 이런 식으로. 일본 원작을 처음 봤을 때가 2년 전인데… 내가 갔을 때가 세번 째였고 싱어송라이터 시바타 사토코(Shibata Satoko)가 게스트였을 때였다.
그때는 일본어를 지금에 비하면 좀 못했다. 그래서 알아듣기가 약간 힘들더라. 근데 공연을 네 시간이나 하는 거다. (웃음) 장소가 되게 좋은 바였고 25명 정도만 볼 수 있었는데, 자리가 없어서 바 안 쪽 카운터 안에서 서서 봤다. 네 시간 동안 서서 있으니까 힘들어 죽겠는데… (웃음) 일본 사람들이 워낙 예의를 중요시 하다보니 중간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혼자 막 괴로워 하면서 중간에 녹음도 잠깐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만드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어떤 ‘완성의 순간’ 같은 광경을 목격했다. 관객임에도 엄청난 희열이 있더라. 보는 사람도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이 너무 좋다고 생각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각자가 느끼는 완성의 순간이 다 다르다는 점이다. 호스트는 뭔가 아쉬운지 한 테이크만 더 하자고 했는데, 나는 ‘이제 됐다. 이제 그만 해도 된다’고 생각했고… 역시나 잘되지 않았다. 혼자 속으로 ‘그 전에 했던 게 완성이라니까’ 이러고. (웃음) 그런게 너무 재미있었다.
그 공연을 했던 사람들이 다 내 친구들이다. 이런 공연일 줄은 전혀 모르고서 놀러간 거다. 딴 것은 모르겠고 막판에 느낀 그 엄청난 것 때문에 ‘이건 내가 무조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중에 친구를 다시 만나 <신곡의 방>이 너무 좋아서 나도 하고 싶다고 했더니, 괜찮으니 대신 라이선스만 써달라고 답했다. 곧바로 귀국해서 공연기획자인 박다함을 만나서 같이 하게 되었다. 2년 전인 2014년 3월에 일본에서 <신곡의 방>을 처음 봤고 나는 10월부터 시작했다. 

Q: 이랑 씨의 <신곡의 방>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가?
이랑: 일단 첫 타자를 누구로 할까 엄청 고민하다가 김목인 씨와 하기로 했다. 워낙 철저한 사람인데다 잘 하니까. 김목인 씨면 못해도 중박이었고. (웃음) 아무튼 모두 재미있는 뮤지션들이고 반응이 다 달라서 즐거웠다. (웃음) 다들 잘 하고 못 하는 지점이 분명하니까, 매번 그것을 맞추고 찾아가는 과정이 힘들긴 해도 나에게는 되게 꿀잼이었다. (웃음) 어떤 분은 가사에 맞춰 곡을 쓰거나, 누구는 멜로디에 맞춰서 가사를 쓰기도 하고, 가사 쓰는 것 자체를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음악은 다 만들었는데 노래 부르는 것을 진짜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어 키라라 같은 경우는 노래하고 가사 쓰는 것에 자신 없어 하길래, 그러면 왜 자신이 없는지 한번 얘기해보라고 물었더니 뭔가를 막 얘기했다. 다 듣고서 “네 얘기를 그냥 나레이션으로 넣자”고 했더니 키라라도 재미있어 하더라. 그것을 그대로 녹음했다. 김목인 씨 같은 경우는 가사 수첩 같은 것을 보여주면서 자기는 계속 글을 수집한다고 했다. 되게 오랜 시간 공들여서 채집한 글을 가지고 단어에 맞는 멜로디를 찾아서 곡을 쓰더라. 김일두는 코드나 진행 같은 것을 창고에다 저장 해서 나중에 거기에 맞는 말을 꺼내 찾는 식이었고. 요한 일렉트릭 바흐 같은 전자음악 뮤지션은 음악 만드는 건 진짜 빠른데 멜로디를 만드는 것은 어려워 해서 내가 옆에서 노래 불러가면서 얹었다. 단편선은 동갑이고 옛날부터 친구니까 티격태격 싸워가면서 했고… (웃음) 일본의 오리지널 <신곡의 방> 팀이 서울에 와서 공연하기도 했다. 5번 트랙에 수록되어 있는 곡인데 그날은 내가 호스트를 하고 일본 호스트가 게스트로 나왔다. 통역을 해야하는 사회자도 두 명이 했다. 




Q: <신곡의 방>을 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을까?
이랑: 나의 <신곡의 방>은 대체로 남자 뮤지션들을 섭외했다. 아무래도 낯선 작업 방식이고 공연이다보니 그들도 되게 힘들어 했다. 왜냐하면 자기 방식을 다 까발려야 하고 원래 음악 만들던 방식대로 시간이 주어지거나 보여주는 것도 아니니까… 노래도 허접하게 나오고. (웃음) 나는 그런 걸 보여주는 것에 대해 상관없다. 오히려 보여줘야 사람들이 음악을 더 재미있어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뮤지션들마다 이런 것을 재미있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고, 되게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창작자의 영역으로만 놔두려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제일 아쉬웠던 점은 김사월 씨 말고는 여자 뮤지션하고 작업을 못했다는 점이다. 사실 <신곡의 방>에서는 멘트를 잘 해야했다. 워낙 토크 위주다 보니… 말이 막히면 안되니까. 나하고 세네 시간을 쉬지 않고 떠들 수 있으면서, 자기 음악을 서슴치 않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여자 뮤지션이 누가 있을까? 계속 게스트에 대해 고민했다. 개인적으로는 퓨어킴을 좋아하고 같이 하면 진짜 재미있을 것 같아서 섭외하고 싶었다. 근데 퓨어킴은 회사에 소속된 몸이라서 컨택하기 어려워서 결국 못했다.
원래 원칙적으로 <신곡의 방>은 시작하면 끝을 낼 때까지 계속 하는 거다. 세네 시간이든 그 이상이 됐든 간에. 만약 완성을 안 해도 된다는 전제를 깔아두면 그날 끝내기 힘들다. 김목인 씨도 처음에는 70-80프로 정도로 만들고서 힘들다며 집에 가려고 했다. (웃음) 사월 씨의 경우는 가사가 장난스러운 것에 대해 자꾸 고민하고 자기검열을 하더라. 그래서 결국 그날 완성을 못하고 나중에 사월 씨네 집에서 했다. (웃음) 

Q: 그렇게 12곡이 모여서 [신곡의 방 컴필레이션] 앨범이 만들어졌다. 들어보니 정말 재미있고 좋더라.
이랑: 앨범도 따로 나오고 정말 재미있는 이벤트였다. 근데 너무 힘들었고 이걸 다시 하기는 힘들 것 같다. 일종의 프로젝트 같은 것이라 생각해서 내 개인 앨범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CD로는 제작을 안 하기로 했고. 매 공연마다 그린 포스터 그림을 살리면 좋겠다는 박다함의 의견이 있어서 엽서로 발매하게 되었다. 

Q: 이후에 일본 원작팀과 교류가 있었나?
이랑: 내가 막 시작할 때쯤 일본 원작이 끝났다. 거기도 컴필레이션 작업물을 낸다고 해서 나보다 훨씬 일찍 작업물을 낼 줄 알았다. 근데 내가 끝냈는데도 1년 동안 아직 안 나왔더라. 나는 현장에서 만든 곡을 거의 가공 없이 모아서 앨범으로 만들었는데, 일본판은 공연 때 만든 것을 바탕으로 추가 녹음을 하고 믹싱과 마스터링까지 새로 다 했다. 문제는 일본판에 참여했던 한명이 결과물에서 자신을 빼달라고 했다는데… 그러면 애초에 <신곡의 방>이란 연간 프로젝트에서 트랙 하나가 빠져 버리는 문제가 생긴다. 그 일 때문에 티격태격 하다가 보니 시의성도 없어졌고 흐지부지 된 것 같다. 원래는 한국과 일본판을 합쳐 2CD로 내서 양국에 같이 발매하려고 했는데 아쉽게 되었다. 



이랑 

신의놀이 소개페이지: http://langlee.squarespace.com 
이랑의 고양이 준이치의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junichixjunichi

2016년 7월 25일 월요일

[인터뷰] 고상지, 윤종수 - 2016-07-25

고상지, 윤종수: 전통과 열정을 뛰어 넘어 BY 김종규 - 2016-07-25

*원본 링크: http://webzinem.co.kr/4531


반도네온 연주자 겸 작곡가 고상지와 바이올린 연주자 윤종수 ©jongkyukim


국내 유명 반도네온 연주자 겸 작곡가 고상지가 두 번째 앨범 [Ataque del Tango]를 들고 돌아왔다. 탱고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la)와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의 곡들을 담은 그녀의 새 앨범을 듣고 있으면 ‘탱고의 어택’이란 앨범 제목처럼 아르헨티나 탱고가 가진 감성과 매력이 충격처럼 다가온다. 게다가 선구자의 음악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으려는 후배들의 기쁨과 희열, 거기에 전통과 열정 사이를 넘나드는 연주자들의 숨결까지 어느 것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을 수 없다. 마침 앨범 발표 즈음에 있었던 고상지의 서울 재즈 페스티벌의 공연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참에 고상지와 음악, 그리고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인터뷰는 지난 6월 20일에 합정역 인근에 위치한 카페 비플러스에서 진행됐다. 인터뷰에는 이번 앨범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온라인 소개글을 작성한 바이올리니스트 윤종수가 함께 했다. 윤종수는 고상지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췄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아티스트들과의 협업, 세션 활동을 하고 있는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다. 본 인터뷰를 통해 [Ataque del Tango]를 중심으로 고상지의 음악 세계, 그리고 고상지와 윤종수의 음악 활동에 관해 하나하나 조명하고자 한다. 너무나 진솔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고상지와 윤종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Q: 개인적으로 [Ataque del Tango]가 세상에 나온 것이 무척 반가웠다. 상지 씨가 연주했던 피아졸라를 워낙 좋아해서. (웃음) 팬들 다수가 상지 씨의 피아졸라를 좋아하지 않나. 반도네온 연주자로서 알려졌으니 이제서야 탱고 아티스트로 크게 한걸음 나아간 느낌이다.
고상지: 스스로를 탱고 연주자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옆에 있는 종수 씨와 비교해봐도 지금 그렇게 탱고에 몰입 하지는 않는 것 같고. 탱고를 너무 사랑해서 냈다기 보다는… 이 앨범은 내지 않으면 안됐어서 낸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앨범은 고상지, 최문석, 윤종수. 이 세 사람이 각자 자기 앨범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혼신의 힘을 쏟아 부은 앨범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Q: [Ataque del Tango]가 나오게 된 경위는?
고상지: 이 앨범에는 아스토르 피아졸라와 카를로스 가르델의 곡들이 담겨 있다. 이전부터 라이브로 연주해 왔기에 앨범으로 내달라는 요청이 많이 있어서 언젠가는 내려고 했다. 근데 어느 순간 피아졸라와 가르델의 레코딩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데 굳이 나까지 낼 이유가 있는가 하는 생각에 부딪혔다. 그런 고민을 하던 중 갑자기 ‘어떤’ 필요성을 느꼈다. 머리보다는 몸이 먼저 시작했다.
앨범 녹음에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피아니스트 최문석 씨가 참여했고 공동 프로듀서를 맡았다. 문석 씨는 쿠바 재즈를 해서 펑크, 라틴 쪽에 베이스가 있다. 같이 작업하다 보니 문석 씨의 스타일이 들어가서 굉장히 리드미컬해졌고 중간에 재즈 같은 프레이즈가 튀어 나왔다. 전체적으로 원곡이 가진 색깔보다 조금 더 굉장히 펑키하게 나왔다. 종수 씨는 클래식 바이올린을 베이스로 삼으면서 아이리쉬, 컨트리, 재즈까지 다양하게 할 줄 안다. 사실 우리 중에서 따로 탱고 연주 동영상까지 보면서 연구할 정도로 가장 탱고에 빠져 있는 사람이다. (웃음) 그런 차별성이 느껴지는 와중에 내 사부님인 코마츠 료타(Komatsu Ryota)의 베이시스트면서 전통 탱고에 뛰어난 다나카 신지(Shinji Tanaka)가 이번 앨범에 참여했다. 우리의 펑키한 탱고와 전통 탱고가 썩 잘 어울렸다. 

Q: [Ataque del Tango]을 작업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앞서 말한 펑키하면서도 연주자들의 특색을 살린 연주 외에 또 있을까?
고상지: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살리려고 한 것은 아니고 연주자들 덕분에 색깔이 나왔다는 게 맞는 것 같다. 이번 앨범에는 연주자마다 각자의 즉흥연주가 많이 나온다. 우리만의 개성이 섞이니까 소리가 굉장히 좋더라. 종수 씨와 문석 씨랑 기타의 김동민이 갑자기 재즈 스케일로 나오는데 탱고인데도 재즈 같기도 하면서 모난 듯이 튀지도 않고 잘 섞였다. 나는 이번에 즉흥연주에는 참여를 안 했는데 나보다는 다른 연주자들의 장점을 살리려고 했다.
윤종수: 피아졸라가 작업한 원곡들에는 본래 피아노와 기타가 참여해서 즉흥연주를 넣기가 어렵지 않았다. 근데 원곡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페르난도 수아레스 파스(Fernando Suarez Paz)는 즉흥연주를 안 했다. 이번 앨범 가운데 ‘Libertango’라는 곡이 있는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유명한 곡이니까, 우리는 그보다 더 차별성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즉흥연주를 넣었다. 애초에 공연 때마다 해서 특별한 편곡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원곡의 레코딩과 비교했을 때 바이올린 즉흥연주가 들어갔다는 점에서 ‘Libertango’에 한해서는 조금 차별화되지 않았나 싶다.
고상지: 앨범 속지에도 응용하긴 했는데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탱고 아티스트 중 하나인 오라시오 살간(Horacio Salgán)이란 분이 예전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 중에 이런 게 있다. 요즘 아르헨티나 젊은이들이 일렉트로닉 탱고 하는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일렉트로닉 탱고든 뭐든 하는 건 좋은데 전통 탱고를 확실히 공부를 하고 하느냐와 하지 못하고 하느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걸음마도 못 하는 사람이 어찌 날 수 있겠는가” 하는 비유를 하셨다. 그렇다고 내가 걸을 줄 안다는 게 아니라, (웃음) 이번 앨범에 참여한 연주자들은 다 전통 탱고를 공부를 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왜냐하면 탱고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가 뒷골목의 남녀가 끈적하게 마음을 주고 받으면서 섹시하게 춤을 추는 장면인 것 같은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통 탱고를 공부 하지 않은 사람이 탱고를 하면 거칠고 끈적끈적하게 연주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고 연주법은 아예 다른 세계다. 이 앨범은 그런 것과는 틀리다. 우리 멤버들은 탱고를 오랜 시간 연습했고 카피했다. 당연히 좌절도 많이 해봤다. 그런 시간을 겪다가 이제서야 우리는 탱고를 연주해도 자기 색깔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전통적인 것들에 좌절을 겪은 사람들이 이번 앨범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분명 전통 탱고와는 차이가 있는… 우리 연주자들만의 색깔을 녹여낸 탱고 음악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Q: 수록된 9곡 중 특별한 선정 기준이 있었나?
고상지: 주로 라이브에서 했던 곡 중에 많은 분들이 원하는 곡 위주로 골랐고, 연주해보면서 다시 선곡을 했다. 거기에다 이번 앨범을 위해서 ‘Bordel 1900’이 새로 들어갔다. 이 곡은 그냥 해보고 싶었다. <탱고의 역사 시리즈>를 다룬 곡 중 하나인데 원래 시리즈가 Bordel 1900 – Cafe 1930 – Night Club 1960 – Concert d’Aujourd’hui. 이렇게 네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시리즈를 전부 해보고 싶었지만 제대로 편곡이 나온 ‘Bordel 1900’만 넣게 되었다. 

Q: 앨범 녹음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움을 겪은 점은 무엇이었나? 앨범 속지에 쓴 글 중에 “나와 윤종수의 광기어린 집착…”이라고 적혀 있던데 무슨 의미인가?
고상지: 이게 뭐냐면 이번 앨범에서 우리 둘이 가장 많이 녹음을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정상적인 수준에서 벗어났더라. (웃음) 다시 하겠습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그렇게 수 차례 다시 했으니까. 셀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들 때까지 녹음했다. 녹음을 봐주시는 레코딩 엔지니어 분 입장에서는 정말 괴로웠을 것 같다. 제일 죄송했던 사람이 녹음 받아주시는 신대섭 엔지니어다. 아마 그때의 프레이즈가 그분 꿈에 나왔을 거다. 나와 더불어 연주하면서 제일 고분분투한 사람은 윤종수다.
윤종수: 일반적인 연주자들은… 그러지 않지. 우리는 상당히 심했다. (웃음)
고상지: 그래서 이번 앨범 중 제일 많이 듣게 되는 소리가 “이거 바이올리니스트 앨범 아니야?”다. 이 앨범은 종수 씨도 자기 앨범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녹음에 많은 시간을 썼다.
윤종수: 상지 씨는 그렇지 않지만 나는 동시녹음에 대한 로망이 있다. 그것을 해내는 사람은 엄청난 고수같고. 해내면 방금 전에 나보다 지금이 훨씬 잘하는 사람이 될 것 같달까. 그래서 당연히 동시녹음을 하려고 했다.
고상지: 근데 그렇게 동시녹음을 고집해야만 한다면 나는 평생 음악 안 할 거다. 낼 이유가 없다. 별로 듣고 싶지 않기 때문에. 윤종수: 동시녹음을 했는데 듣고 싶은 만큼 연주를 해내는 것이 내 로망이다. 문제는 그럴려면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웃음)
고상지: 나중에 찾아보니 피아졸라도 동시녹음을 안 한 게 있었다. 들어봤는데 완전 똑같더라. 그러니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동시녹음이든 후시녹음이든 똑같다면, 그저 최대치가 나올 때까지 계속 녹음하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라이브와 녹음의 차이다. 두 개가 별 차이가 없다면 굳이 1년 동안 고생할 것도 없이 그냥 한번에 녹음하면 된다. 근데 그렇게 하다가는 평생을 해도 안될 것 같다.
윤종수: 그렇지. 그러면 완성도가 너무 낮을 것 같다. 이런 앨범이 절대로 나올 수가 없었겠지. (다들 웃음)
고상지: 내가 봤을 때는 앨범이 만족스럽게 잘 나왔고 괜찮다. 그렇지만 레코딩 엔지니어와 믹스 엔지니어 두분은 정말 고생하셨다. 그분들이 없었으면 절대 이 앨범을 이정도 퀄리티로 만들어 낼 순 없었을 것이다.




Q: 앨범 수록곡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을 꼽으라면?
고상지: 나는 ‘Adios Nonino’, ‘Chin Chin’, ‘Primavera Porteña’. 이거 세개… 아, 다 마음에 든다.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웃음)
윤종수: 나는 ‘Chin Chin’하고 ‘Primavera Porteña’ , 그리고 ‘Libertango’. 그렇게 많은 곡을 녹음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앨범에 실린 내 소리는 여태까지 녹음된 것 중 가장 예쁘게 잘 뽑혔다. 특히 이 세 곡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너무 훌륭했다. 엔지니어 분들의 힘이다. 

Q: 듣고 보니 [Ataque del Tango] 앨범 녹음 전 과정이 기억에 남는 일이겠다.
고상지: 그렇다. 지금 말하는 것 이상이다. 더불어서 ‘El Dia Que Me Quieras’하고 ‘Oblivion’은 노트가 적기 때문에 쉽게 넘어가는 트랙이라고 예상했는데 그것조차 너무 어려웠다.
윤종수: 아까 했던 이야기를 약간 더 이어서 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엄청나게 반복해서 녹음한 것에 대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당연히 그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음반의 완성도에 대한 기준이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의외로 유명 해외 연주자들의 레코딩을 들어보면 우리 기준보다 관대한 것 같아서 놀랄 때가 있다.
고상지: 당연히 그들이 엄청나게 잘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근데 가끔 ‘어, 여기 음정 낮은데. 여기 음정 틀렸는데 왜 넘어갔지?’ 하는 부분이 생각 외로 많다.
윤종수: 우리라면 그것은 말도 안된다. 근데 상지 씨가 그러더라. 우리보다 훨씬 잘 하시는 분들임에도 완성도의 기준치가 낮은 편이라고. 본토 탱고 뮤지션들의 성향이라고도 해야할 것 같다.
고상지: 탱고에서는 그런 음정과 박자보다 실제로 ‘소울’이 더 중요하다. 탱고 뮤지션은 소울 보다는 ‘심장’이라는 뜻에서 ‘꼬라손(Corazón)’이라고 표현한다. 꼬라손이 중요한 것은 알지만 잘 안된다. 그래서 더 집착했고… ‘El Dia Que Me Quieras’와 ‘Oblivion’ 같은 곡은 노트가 적어서 심장 표현이 더 잘 안되더라. 이건 나의 테크닉의 부족 탓이다. 끝까지 갔다가 계속 반복했던 게 이 두 곡이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나는 이번 앨범에서 내 심장을 다 내놨다. (웃음)
윤종수: 나도 ‘Oblivion’이 아쉽긴 하다. 하지만 부족한 능력 안에서 최대한 보여드리려고 했다. 상대적으로 느린 곡들이 아쉽고 빠른 곡들은 내 기대보다 너무 잘 나온 것 같다. 


고상지의 앨범 [Ataque del Tango]와 [maycgre 1.0] ©jongkyukim 


Q: 새 앨범이 나왔는데 발매 공연을 할 예정인가?
고상지: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이다. 2014년에 나온 1집 [maycgre 1.0]의 경우에는 자작곡으로 채워진 앨범이니 당연히 발표하는 의미에서 발매 공연을 했다. 그렇지만 이번 [Ataque del Tango]는 라이브에서 항상 하던 곡들을 스튜디오에서 그대로 녹음 했을 뿐이다. 내 의지보다는 앨범을 듣고 싶어하는 리스너들의 요청에 의해 만든 앨범에 가깝다. 그러니 굳이 원래 하던 공연을 또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지금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 일단 다른 콘셉트의 공연을 생각해두고 있긴 하다. 

Q: 앨범 디자인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이번 [Ataque del Tango]은 커버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잘 나왔다. 곡 설명이 전부 들어가서 탱고 음악 입문용 음반으로도 좋을 것 같다. 상지 씨가 직접 작성한 텍스트를 읽는 것도 재미있다.
고상지: 감사하다. 커버 하나까지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정규 1집 앨범 때는 많이 팔릴 것이라 생각도 안 했기 때문에 제작비를 최소한으로 했다. 실제 보면 알겠지만 그림만 덩그러니 있어서 좀 심심하다. 1집을 샀는데 아무 글이 없어서 아쉽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사주셔서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너무 죄송해서… 이번에는 그때 서운해 하셨던 분들을 위해서 제작비를 많이 쓰기로 하고 텍스트도 마구마구 넣었다. 정규 1집 때도 할 말이 참 많았는데 이번에는 그런 아쉬움이 없다. 


고상지 앨범 [Ataque del Tango] 중 ©jongkyukim


Q: 앨범의 텍스트 중에서 인상적인 구절이 있더라. “수동적 창작이 아니라 그 곡을 들었을 때의 자신의 감정과 인상이 마치 메아리처럼 반사돼 나에게 도달된 ‘그것’을 표현하라고 했다. 오라시오 살간의 이 말씀이 그 후 나의 편곡과 작곡에 있어서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그 글을 읽으니 음악을 듣는데도 이해가 더 잘되는 것 같다. 혹시 오라시오 살간 하고는 만난 적이 있는가? 말이 나온 김에 아르헨티나에서 있었던 일도 잠깐 들려줬으면 한다.
고상지: 이 역시 그 분이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이고 항상 내가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는 생각이다. 공연도 많이 봤고 이 분의 음악을 정말 사랑한다. 얼마 전 그 분이 100세 생신을 맞이하셨다고 해서 아르헨티나에서도 난리가 났다. 계속 만수무강 하셨으면 좋겠다.
아르헨티나의 좋은 점은 이런 거장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다. 탱고의 본고장인 부에노스 아이레스만 해도 이런 분들이 모여 살고 계시는데, 어쩌다 해외 투어를 가시지 않는 이상 어렵지 않게 그들의 공연을 볼 수 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공연을 보곤 했는데 공연료가 싼 것은 3000원 정도고 비싸도 3만원에서 5만원 하니깐 너무 좋았다. 공연이 끝나고 “너무 좋았어요. 근데 저 좀 가르쳐 주시면 안돼요?” 하면 연락처를 주셨고 나중에는 그분들께 배우고… 이런 삶이 보편화되어 있다. 

Q: 지난 1집 앨범 [maycgre 1.0]의 각 곡들은 어떤 모티브를 가지고 쓰여졌는지도 물어보고 싶다. 고상지 씨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가지고 썼다는 이야기 정도만 알려져 있지, 자세하게는 언급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서.
고상지: 내 곡에는 여러 캐릭터의 이미지들이 섞여 있다. <베르세르크>의 그리피스와 <에반게리온>의 레이를 염두해두고 쓴 곡은 ‘Chivalry’다. <슈타인즈 게이트>의 크리스와 <에반게리온>의 아스카를 섞어서 ‘Red Hair Heroin’를 썼고. ‘Envy’는 <강철의 연금술사>의 엔비를 두고 썼다. ‘출격’은 <에반게리온>의 신극장판에서 나온 마리고. ‘홍제천의 그믐달’은 애니메이션의 엔딩곡처럼 쓰고 싶었던 곡이다. ‘暗’은 큰 의미 없이 마지막에 넣은 곡이고. ‘빗물 고인 방’은 애니메이션과는 상관없이 탱고적인 곡이다. 전에 양효주 영화 감독과 작업하면서 현대무용에 어울리는 곡을 써달라고 요청 받아 쓴 곡이다. 처음에는 1번 곡 ‘출격’을 타이틀 곡으로 하려고 했다가 나중에 ‘빗물 고인 방’으로 바꿨다. 이유는 (이)적이 오빠가 앨범을 들어보더니 “이게 제일 낫네” 라고 했고, 기왕이면 라이브가 가능한 곡을 타이틀로 하는 게 낫다는 의견에 정하게 되었다. 

Q: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취향의 폭은 넓은 편인가?
고상지: 폭은 좁다. 이른바 나 자신을 오타쿠라고 어필을 하지만 종수 씨와 문석 씨의 경우에는 작품 위주로 훨씬 많이 본다. 나는 한 캐릭터에 꽂히면 그 캐릭터만 판다. 훌륭한 것을 보면 그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마치 돌파구처럼 그 캐릭터에 대한 곡을 쓴다. 대체로 다른 애니메이션 팬 분들은 나보다 더 다양하게 보지 않나 싶다. 

Q: 국내에서도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관련 축제가 자주 열리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공연 섭외 같은 게 안 들어오는가? 본인을 ‘오타쿠’로 소개하는 고상지 씨라면 그곳에서 공연하기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에반게리온 메들리’도 공연 때 자주 하지 않은가.
고상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만 아직 없다. 다른 오타쿠 분들이 나한테까지 신경 써주지는 않는 것 같다. (웃음) 사실 오타쿠 분들께 인정받고 싶어서 대놓고 어필도 했는데 잘 안되서 지금은 포기했다. 나의 소중한 경력 중 하나는 부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겁쟁이 페달> 극장판 감독과 프로듀서를 인터뷰한 것이 있는데, 욕심 같아서는 더 많은 것을 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된다. 대신에 일반인들을 영업하게 되었다. (웃음) 공연에 와주시는 분들이 가끔 <슈타인즈 게이트>나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보신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Q: ‘고상지 밴드’라는 이름으로 고상지, 윤종수, 최문석이 함께 활동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세 사람이 함께 활동 하는 것인가?
고상지: 대체로 피아노는 최문석이고 바이올린은 윤종수이긴 한데… 사실 나는 팀 만드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 그냥 고상지만 이름을 올리면 반도네온 솔로 공연으로 아실 수 있으니까. 밴드라는 이름으로 올리는 거다. 고상지 밴드를 정식으로 결성한 것은 아니다.
윤종수: 정식으로 하기에는 각자 바쁘게 활동하는 것도 있다. 문석 씨는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는 것도 있고.
고상지: 윤종수 씨는 본인의 클래식 스트링 팀인 ‘필스트링’을 꾸려서 활동하고 있고 따로 세션 활동도 하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다들 그렇게 각자 활발하게 활동을 해야 돈도 벌 수 있다. 내 라이브 때 문석 씨와 종수 씨가 못 하게 되는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참여한다. 이 역시 고상지 밴드라는 이름을 쓴다. 그래서 고상지 밴드를 이 셋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물론 셋이 가장 오래하기는 했지만 각자 활동하는 게 더 익숙하다. 

Q: 오래 같이 활동했는데 매주 합주를 하는지?
고상지: 문석 씨까지 한 4년에서 5년 정도 함께 했는데 지금 우리는 호흡이 잘 맞는다. 합주는 그렇게 많이 하지 않는 편이고 주로 개인 연습 위주로 한다. 개개인의 연마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연이 잡히면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데 정기적으로 하진 않는다.
윤종수: 나도 음악하면서 정기적으로 합주를 한 적은 없었다. 최근에 컨트리 음악을 하는 ‘컨트리공방’이란 팀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이 팀은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 합주를 하고 있다. 나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컨트리 음악을 좋아하긴 하지만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기적인 합주는 필요한 것 같다. 또 연주 외에도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중이다. 

Q: 상지 씨와 종수 씨는 함께 활동을 오래했다. 만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는가?
윤종수: 한양대에서 클래식을 전공했다. 당시 나를 지도해주셨던 선생님과 함께 카이스트에 연주할 일이 있어서 갔는데 그때 상지 씨가 반도네온을 연주하러 왔었다. 알고보니 선생님이 상지 씨의 이모더라. (웃음) 물론 그건 나중에 알았다. 아무튼 그때 첫인상이 굉장히 강렬했다. 지금도 독특하지만 그때는 끝판왕이었다. (웃음)
고상지: 나중에 밥을 먹을 일이 있었는데 연주자석이 정해져 있었다. 근데 동석한 윤종수 씨가 자꾸 나한테 몇살이냐고…
윤종수: 상지 씨가 선생님의 아끼는 조카라고 하니까. 게다가 처음 만나기도 했고 다루는 악기도 신기해서. 나는 그냥 평범하게 한국에서 사람과 사람이 알아가는 방식으로 질문한 것이었다. (웃음)
고상지: 나는 처음 만난 사람인데 나이를 물어보길래 좀 불쾌했다.
윤종수: 한국식이었지. (웃음) 그때는 그냥 참 특이한 친구구나 하고 헤어졌다. 나중에 잠깐 보긴 했는데 그때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그러다 5년 정도 지나서 상지 씨가 한국에서 막 활동을 하려고 하던 참에 다시 만났다. 탱고 음악에서 바이올린은 거의 필수적으로 중요한 악기인데 상지 씨가 멤버를 찾고 있었다. 그때 내가 어떤 공연에서 대타 같은 것으로 참여를 한 적이 있는데 서로 잘 맞았다. 문석 씨는 나보다 먼저 함께 하고 있었다.
고상지: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연주자의 개성을 떠나 내가 일일이 참견하지 않아도 알아서 탱고에 빠져들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데 종수 씨는 말 그대로 정말 그렇게 했다. 내 사부님인 코마츠 료타의 사모님이 탱고 바이올리니스트인 콘도 쿠미코(Kondo Kumiko)인데, 그 분에게도 레슨을 받고 혼자서 연습을 해서 이제는 전통 탱고를 너무 잘한다.
아르헨티나에서 공부한 나보다 더 전통 탱고를 익히고 있다. 나는 아예 전통 탱고를 포기했다. (웃음) 그쪽을 8-9년 공부를 했지만 지금은 듣는 것도 하는 것도 너무 힘들다. (웃음) 나중에 다시 좋아지기는 할테지만 하도 좌절을 많이 해서… 지금은 애증(愛憎)에서도 증에 해당하는 시기랄까. 그러다보니 더욱 다른 음악들만 듣고 있다. 종수 씨는 여러가지를 할 줄 알면서도 탱고에 빠져 있는 사람이다. 

Q: 코마츠 료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작년에 홍대 벨로주에서 코마츠 료타와 함께한 <도쿄 반도네온 클럽>의 공연을 봤는데 굉장히 좋았다.
고상지: 원래 <도쿄 반도네온 클럽>은 일본의 반도네온을 배우는 클럽 같은 단체다. 그날 공연은 반도네온 연주자만 아마추어고 나머지 연주자들은 프로였다. 쉽게 말해 반도네온을 위한 공연이라고 보면 된다. 사부님이 정기적으로 레슨생을 지도하러 한국에 오시는데, 마침 레슨생들도 그 공연에 올릴 겸해서 나랑 종수 씨도 참여했다. 그날의 레퍼토리는 완전한 전통 탱고였고 딱히 편곡이 안 들어간 오리지널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올해도 지난번처럼 벨로주에서 하는데 8월 27일과 28일에 한다. 이번에는 좀 더 업그레이드 될 예정이다. 

Q: 특히 마지막에 코마츠 료타가 연주한 ‘Adios Nonino’가 매우 훌륭했다.
고상지: 그때 바이올린은 사모님이었고 베이스가 이번 앨범에 참여한 다나카 신지였다. 거의 오리지널 스코어로 연주했다고 보면 된다. 아르헨티나 탱고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레오폴트 페데리코(Leopoldo Federico)의 편곡을 그대로 살렸다. 그날의 공연은 나에게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왜냐하면 코마츠 선생님만의 편곡이 있음에도, 전통 탱고를 재현한다는 그날의 취지에 맞게 그대로 마에스트로의 연주를 살려서 보여주었다. 역시 사부님이다. 딴 소리지만 항상 사부님이 하시는 말씀 중에 “전통 탱고를 파지 않은 사람이 피아졸라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연주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도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혼나기만 하고 있다. (웃음) 


2013년 홍대 벨로주에서 열렸던 <고상지 밴드 & 유정연’s Orquesta Tipica Pacifico> 공연 중 ©jongkyukim 


Q: 1년에 1번씩 여러 대의 반도네온과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로 구성된 전통 방식의 탱고 오케스트라인 <퍼시픽 탱고 오케스트라>에서도 참여하고 있다. 멤버들이 아시아의 탱고 연주자들로만 모인 것도 있고 여러모로 인상적인 공연이었다.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유명한 유정연 씨가 주축인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매년 진행했는데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는가?
고상지: 그건 유정연 오빠가 아예 리더로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우리는 그냥 세션으로만 참여해서 많이 알지는 못한다.
윤종수: 거기서 우리는 완전히 세션으로만 참여하고 있다. 거의 일본 연주자들로 구성되는데… 다나카 신지와 코마츠 료타의 천재 제자라고 불리는 키타무라 사토시(Satoshi Kitamura) 등이다. 연주와 섭외, 스케줄 관리, 곡 선정, 편곡 같은 것들을 전부 유정연 선생님이 하고 있다. 우리는 세션으로만 참여하는 프로젝트다. 그런데 매번 벨로주의 박정용 사장님부터 시작해서 관객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피드백이 돌아왔다. 연주 때마다 미흡한 면이 보이는데도 사람들이 너무 사랑해주시는게 느껴지더라. 연주자로서도 감사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정도면 많이 하는 편도 아니기도 하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갔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공연도 공연이지만 같이 하는 연주자들이 너무 좋다.
고상지: 나도 키타무라 사토시랑 다나카 신지와의 공연은 돈 내고서라도 하고 싶을 정도다. (다들 웃음) 

Q: 두 사람은 악기를 오래 연주했는데 한국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고상지: 예전에 막연히 음악을 하고 싶었을 적에는 꿈도 못 꿨던 일들이 지금 반도네온을 하면서 벌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반도네온이란 생소한 악기를 연주할 수 있어서 이렇게 먹고 살고 하는 것 같다. 앞으로도 음반을 만들고 편곡도 하면서 단독공연도 하고 그런 활동들을 계속할 예정이다. 이 모든 것이 반도네온에서 나온다. 나도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국에서 음악하는 게 좋다. 아르헨티나에 오래 안 머물고 공부 끝나자마자 바로 한국으로 돌아와서 활동한 것도 그런 이유다. 주변 사람들은 힘들다고 하는데 나는 크게 와닿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윤종수: 내가 전공한 클래식으로 안정된 직장을 얻으려면 딱 하나 방법이 있다. 바로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회사원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에는 굉장히 힘들고 한정적인 일이다. 그런것에 비해서 속칭 실용음악 쪽은 안정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게 하나도 없다. 그저 본인이 일종의 회사 같은 것이 되어서 자기가 다 헤쳐 나가야만 한다. 또 가르치는 것은 안정적이기 보다는 불규칙하다. 레슨을 받는 사람이 없으면 돈을 못 버니까. 나 역시 복을 많이 받아서 돈 때문에 힘든 적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저것 많이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보면 나와 상지 씨. 둘 다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말이 나온 김에 상지 씨에 대해 한 마디만 보태자면… 물론 운이 좋았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옆에서 봤을 때 정말 미친듯이 열심히 하고 부지런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가끔은 나도 반성을 한다. 내가 확신해서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이 친구보다 부지런한 뮤지션은 거의 없다는 거다. 반도네온을 다루는 연주자가 별로 없는 한국이라서 잘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실력이 뒷받침이 되었기에 이런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것이고 그만큼 인복도 따르는 것이다.
고상지: 내 실력이 향상할 수 있도록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안 하면 언제든지 뒤처지니까. 




Q: 라이브가 좋은가 녹음이 좋은가?
윤종수: 녹음은 라이브보다 5배 이상 부담되는 것 같다. 개인 목표치가 높은 편이라서 녹음이 크게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라이브는 라이브라서 실수가 있더라도 그냥 웃으면서 넘기는 편이다. 라이브가 마음 편하다.
고상지: 물어볼 것도 없이 녹음이다. 라이브는 매번 너무 떨려서 죽을 것 같다. 무대 올라가기 전에 ‘언제까지 이렇게 떨어야 하나’ 하고 고민한다.
윤종수: 개인적으로는 장르에 따라 다른 것 같다. 탱고는 부담이 덜하고 클래식도 그렇다. 근데 컨트리는 심하다. 또 재즈 연주를 할 때는 상지 씨가 느끼는 것 만큼 떨리는 것 같다. 너무 부족한데도 너무 잘 하시는 분들과 할 기회가 많이 있다보니… 이전에는 라이브가 부담된다는 상지 씨의 말에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내가 재즈 연주를 할 때부터 똑같은 입장이 되버리니까. 그때서야 이런 심정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고상지: 스튜디오에 있으면 하나도 안 떨린다. 되게 냉정하게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데 무대는 단 한 번 뿐이니까. 라이브에 너무 부담을 느끼면 심장이 빨라지면서 기분이 이상해진다. 집에서 연습할 때까지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해도 무대에 올라가면 아무 기억이 안 난다. 연주자들이 심장 박동수를 낮추기 위해 먹는 인데놀이라는 약이 있는데, 언젠가 한번 그것을 잘못 먹었더니 연주 중에 헛것이 보였다. 원채 내가 저혈압이라… 그 방법도 안되겠더라. 아무튼 그런 이유로 무대가 힘들다.
솔직하게 말하면 난이도가 쉬운 연주는 하나도 안 떤다. 근데 내 이름으로 올라가는 공연은 난이도가 높고 어렵다. 노트도 많고 모든 게 톱니바퀴처럼 다 맞아야 한다. 그런데 세션을 할 때나 간혹 쉬운 공연에는 뭐, 쉽게 한다. (웃음) 하지만 스튜디오에서는 하고 싶은 것을 정확히 할 수 있기 때문에 녹음이 좋다. 

Q: 음악을 하면서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은?
고상지: 좋아하는 뮤지션, 선배님들에게 연락 올 때가 좋다. 또 내가 만든 곡을 들려줬는데 사람들이 좋아해줄 때가 좋다. 안 좋은 점은 너무 많은데… 라이브에서 잘못 했을 때가 너무 힘들다. 워낙 라이브 일정이 많은데 한 번 자괴감이 쌓이면 좀처럼 풀리지 않은 채로 지나는 거니까 정말 미칠 것 같다. 대부분의 삶이 좌절의 삶이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일을 못했을 때 기분 안 좋은 것처럼.
윤종수: 대부분의 뮤지션들이 그렇듯이 음악을 너무 사랑해서 연주를 잘 했을 때는 너무 좋고, 좋은 음악을 했을 때도 너무 좋다. 안 좋을 때는 상지 씨와 비슷한 것 같다. 잘못하면 심하게 좌절감에 빠진다. 근데 우리 둘은 그 기분이 좀 엄격한 것 같다.
고상지: 무대에서 떨리는 것은 익숙해지지 않지만 이걸 넘어서야 다음 곡을 쓰고 그렇게 음악을 계속할 수 있다.
윤종수: 그런 것을 견뎌야 눈꼽 만큼이라도 발전이 있고 경험이 쌓이는 것이겠지. 

Q: 최근에 겪은 가장 인상 깊었거나, 영감을 줬던 일은?
고상지: 영화 <대니쉬 걸(The Danish Girl)>이다. 주연 배우인 에디 레드메인(Eddie Redmayne)이란 배우를 엄청나게 파고 있다. (웃음) 원래 애니메이션 음악을 좋아한다. 싸우거나 날아다니는 전투 장면에 나오는 음악… 그러니까 자극적이면서 흥분시키는 음악 위주로 좋아하다가 이번에 잔잔한 <대니쉬 걸>의 음악에 꽂혀서 하루종일 듣고 있다. 원래 영화 음악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없었는데 지금은 엄청나게 하고 싶어졌다.
윤종수: 지금 결혼한 지 1년이 좀 넘었는데 결혼하기 전보다 연습량이 너무 줄었다. 엄청 게을러졌다고 보면 된다. 스스로 알고 있고 이러면 안된다고 아는데도… 연주자마다 바이오리듬이 있긴 하다. 연습하다가도 안 하는 주기말이다. 그래서 안 하는 기간을 최대한 짧게 해야 되는데 최근에 되게 길었다. 그러던 때에 최근 어떤 공연을 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날 이후로 개인적으로 연습을 많이 하고 있다.
고상지: 실력이 좋았나?
윤종수: 아니, 너무 못하더라. 기대를 많이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고상지: 떨어서 그런거 아냐?
윤종수: 그렇다고 해도 실제 공연에서 못해봐라. 바로 못한다는 소리 듣지 않나. 그러니까 떨든 안 떨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고상지: 그건 그렇다. 오늘 이야기 중 가장 인상적이다. 갑자기 연습이 엄청 하고 싶어졌다. (웃음)
윤종수: 또 어제 어반자카파의 세션으로 공연을 했는데 여기서도 엄청난 자극을 받았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인데 곡도 잘 쓰고 노래도 너무 잘 하고… 이미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지 않은가. 그런 자극들이 있었다.


2016년 고상지 밴드의 서울 재즈 페스티벌 공연 중. 비브라포니스트 이희경도 함께 했다 ©jongkyukim 


Q: 이번에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 상지 씨의 공연을 보았다. 그때 들은 ‘무한의 유피’, ‘성층권’, ‘사이타마’ 같은 신곡들을 앨범에서 만날 수 있을까?
고상지: 정규 3집에 실릴 예정이다. ‘무한의 유피’는 <헌터 X 헌터>에 나오는 유피라는 등장인물을 가지고 쓴 곡이다. 유피를 처음부터 좋아한 것은 아니고 나중에 좋아하게 되었다. 그 만화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힘이 쎄지만, 유피가 각성하는 모습은 너무 멋졌다. ‘무한의 유피’는 말 그대로 유피는 무한이란 의미다.
사실 ‘무한의 유피’는 애니메이션 <천원돌파 그렌라간>에서 먼저 모티브를 얻었다. 거기서 얼굴이 없는 적이란 의미의 무간이란 적 세력이 나온다. 무간들이 나올 때 음악이 웅장하고 너무 좋아서, 그것에 자극을 받아서 곡을 썼다. 근데 작업이 더디던 중에 <헌터 X 헌터>의 유피를 알게 되면서 마침내 마칠 수 있었다. 그래서 제목이 ‘무간’에서 ‘무한의 유피’로 바뀐 것이다. 애니메이션 중에 <무한의 리바이어스>라는 작품이 있는데, 비슷한 어감이기도 해서 정했다. 아마 다음 앨범 곡 소개에 이 이야기는 쓸 것이다. 아무래도 유피에 대한 애정이 크기 때문에 곡 자체에도 애착이 크다. <원펀맨>을 모티브로 삼은 ‘사이타마’의 경우에는 제목이 일본어라서 나중에 바뀔 수 있다. 

Q: 같은 자작곡 앨범으로서 3집은 1집의 연장선이 되는가? 또 1집 때의 ‘출격’ 같은 뮤직비디오를 기대해도 좋을까?
고상지: 원래 [Ataque del Tango]는 자작곡이 아닌 커버 앨범이라서 2집으로 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근데 이번에 다들 혼신의 힘을 다 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나한테도 존재감이 크다. 그러므로 [Ataque del Tango]가 2집이 되었다. (웃음) 앞으로 나올 정규 3집은 자작곡이 담길텐데 단순히 1집의 연장선이라기 보다는… 그냥 나의 음악적 색깔은 원래부터 자작곡에 있다고 보면 된다.
사실 나의 음악가적인 자아는 반도네온 연주자가 아니다. 정규 1집 때는 작곡가로서 나를 더 어필하고 싶었고, 이번 앨범에서는 프로듀서로서 공짜 반도네온 세션을 쓰는 것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원래 이번 [Ataque del Tango] 앨범에 기타와 바이올린 듀오만 들어간, 종수 씨가 주인공인 곡을 하나 실을려고 했다. 아쉽게 들어가진 못했는데… 어쨌든 아마 다음 앨범에는 반도네온이 덜 들어가는 앨범이 나오지 않을까.
이번 앨범에서는 뮤직비디오를 제작할 계획은 없지만 나중에 ‘출격’ 같은 자작곡이 새로 나온다면 만들 계획은 있다. 곧 작업에 들어갈 정규 3집에서는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싶은 컨셉이 2개나 있다. 근데 진짜로 하려면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겠지. (웃음)

Q: 10년 후에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고상지: 내일이나 오늘이라도 사고로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의미없음, 이다.
윤종수: 훨씬 더 연주를 잘 하게 되고 모든 장르를 하고 나중에는 해외 투어를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Q: 뮤지션으로서 언젠가 서보고 싶은 무대가 있다면?
고상지: 라이브 무대에 대해서는 특별히 꿈꾸거나 하지 않는다. 웬만큼 같이 하고 싶은 사람들과 공연은 다 해 봤고 무엇보다 라이브는 일이란 느낌이어서… 그보다 스튜디오에서 계속 작업하고 싶다. 지금은 영화음악을 좀 해보고 싶은데 뭐든 좋을 것 같다.
윤종수: 말도 안 되는 거긴 하지만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에 선다면 좋을 것 같다. 




Q: 그러고 보니 이채언루트의 강이채 씨도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을 얘기 했다.
윤종수: 이채 씨도 그렇게 이야기했나?
고상지: 한국에서 한 명만 나간다면 이채 씨가 가겠지. (다들 웃음)
윤종수: 두 명이 나갈 수도 있지. (웃음)
고상지: 페스티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피아졸라와 관련된 일화가 떠올랐다. 피아졸라가 1986년 스위스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섰을 때 일이다. 그때 피아졸라의 바로 전 무대가 되게 말도 안되는 사람…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였었다. 그래서 피아졸라도 다소 주눅이 든 채 무대에 올라갔다고 한다. 관중들은 피아졸라를 잘 모르기도 하고 악기인 반도네온도 생소하니까 시작 전부터 너무 조용했었다. 피아졸라는 ‘이 반응은 정말 좋거나 정말 최악이구나 둘 중 하나다’ 라면서 첫 곡을 연주했다. 그 10여 분이 지독하게 끔찍했다고 적었다. 그런데 곡이 끝나자 사람들이 일어나 엄청난 갈채를 보내며 소리를 질러댔다더라. (웃음) 아무튼 피아졸라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Q: 나중에 같이 작업했으면 하는 아티스트가 있다면?
고상지: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 성우와 작업하고 싶다. 한국 라디오에서는 일본어가 방송에 나오면 심의에 걸린다고 하니 일본에서 해야할 것 같다. 내가 만든 배경음악을 깔고 거기에 일본어로 된 나레이션을 넣는 방식이다. 나는 일본어가 가진 목소리 울림을 너무 좋아하는데 애니메이션을 볼 때도 목소리의 중요성이 50% 정도다. 작업은 내가 좋아하는 성우들과 꼭 하고 싶다. 같이 하고 싶은 성우들이 너무 많다. 요즘 꽂힌 성우는 우치야마 코우키(Kouki Uchiyama)인데 <헌터 X 헌터>에서 메르엠이란 캐릭터를 했다. 최근 뜨는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에서 나쁜 놈 역할을 했다. 정말 악의 절정인 역인데도 목소리가 너무 멋있어서 계속 응원하는 중이다. (웃음) 다음 주에 마지막이 나오는데 제발 말 좀 많이 해주길… 너무 조금 밖에 안해서. (웃음)
윤종수: 어제 같이 공연해서 아직 못 빠져 나오고 있는데 어반자카파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잘 한다. 

Q: 앞으로의 활동은 어떻게 되는가?
고상지: 나는 이제부터 녹음 작업을 시작한다. 새 싱글과 정규 3집을 위해서. 싱글은 가을에 나올 것 같고 3집은 내년 초에 나올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곡을 쓰고 편곡하면서 작업을 할 것이다. 그저 좋은 성과가 나오길 바랄 뿐이다.
윤종수: 최근 1년 동안 지지부진하게 끌었던 새로운 팀을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터틀 아일랜드 스트링 쿼텟(Turtle Island String Quartet)이라는 재즈 스트링 팀을 좋아해서 그런 팀을 만들고 싶지만… 재즈만 하기에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니까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수 있는 팀을 하려고 한다. 내가 아이리쉬나 컨트리 쪽 음악을 하기도 했으니까. 그런 음악들을 같이 할 수 있는 팀을 만드려고 한다. 


고상지 

윤종수 

2016년 4월 4일 월요일

[인터뷰] 이아립 - 2016-04-24

이아립: 작지만 당신을 깨우는 목소리였으면 BY 김종규 - 2016-04-24

*원본 링크: http://webzinem.co.kr/4051


이아립 2016.04.04. ©Jongkyu Kim 


올해 초 다섯 번째 솔로 앨범 [망명]을 발표한 싱어송라이터 이아립은 언제나 남다른 행보를 보여주는 존재다. 한 때 유행했던 모던록 밴드 ‘스웨터’에서는 프론트를 맡았었고, 혼자만의 레이블인 ‘열두폭 병풍’을 만들어 음악과 관련된 모든 작업을 했으며, 동료 음악가 이호석과 함께 혼성 듀오 ‘하와이’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디자이너, 영화 음악감독, 라디오 디제이 등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해왔다. 지금은 [망명] 앨범을 함께 작업한 레이블 일렉트릭 뮤즈와 여러가지 공연을 해오고 있는 중이다. 

지난 3월 16일에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각각 새 앨범을 발표한 이아립과 이호석의 공연이 있었다. 나는 이날 개인사정으로 늦는 바람에 공연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기왕 왔으니 싸인이나 받자는 마음에 앨범을 들고 싸인회 중인 이아립에게 갔다. 이아립은 깊고 명료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공연 잘 보셨어요?” 나는 그냥 공연이 좋았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좋으셨어요?” 이아립은 지긋이 나를 쳐다보며 두 번째로 물었다. 그 말에 나는 차마 공연이 좋았다고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어른에게 거짓말을 고백하는 아이처럼 사실대로 말해버렸다. 처음에는 황당해 한 듯 보였지만 곧 이아립은 상냥하게 “다음에 꼭 공연장에서 만나요” 라고 했다. 

며칠 뒤 나는 대림미술관의 D PASS 공연에서 이아립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이아립은 잔잔한 울림과 여운, 따뜻하고 인간적인 노래로 관객들을 흠뻑 빠져 들게 만들었다. 나 역시 공연이 끝날 때까지 감상적인 기분이었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이아립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인터뷰는 지난 4월 4일 저녁 8시에 연희동 카페 마호가니에서 진행되었다. 이 기록은 이아립과 나눴던 특별했던 시간을 제대로 살리고자 대화체로 서술한다. 


이아립과의 인터뷰 (사진출처 = 이아립 페이스북) 


Q: 사실 스웨터 시절부터 이아립 씨의 팬이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그때 공연이 좋았냐고 물어보면서 저를 살짝 쳐다보셨는데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속 시원하게 그 자리에서 이야기했죠.
아립: 제 눈빛이 진실만을 말하게 하는 눈빛인가 보군요. (웃음) 

Q: 이번 인터뷰에서는 저처럼 예전 스웨터 시절의 이아립 씨의 모습만을 기억했던 사람들에게 지금의 이아립 씨의 소식을 알리고 싶습니다.
아립: 한동안 이아립을 포털사이트에서 치면 연관 검색어에 스웨터나 관련 단어들이 안 떴어요. 근데 이번 [망명] 앨범이 사람들에게서 스웨터의 기억을 다시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아요.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되게 반가워요. 옛날 친구를 다시 만난 느낌도 들고. 

Q: 얼마 전 단독 공연 끝나고 한 팬이 스웨터 EP 앨범을 들고 가서 사인해달라고 했다는 제보도 있었어요.
아립: 예, 맞아요. EP를 누가 들고 왔었어요. [Zero Album Coming Out…]이 딱 나와가지고 ‘헐… 대박’ 했죠. 유물을 들고 오셨더군요. (웃음) 

Q: 혹시 너무 옛날 일이라 잊고 싶은 과거는 아니죠?
아립: 전혀 아니에요. 스웨터는 제가 음악을 하는데 있어서 시작과 기초인걸요. 덕분에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그때 음악은 지금 들어도 여전히 좋고 아직도 좋아해요. 스웨터는 저의 일부인 걸요. 

Q: 그러면 기왕 이야기 나온 김에 하나만 묻겠습니다. 스웨터가 해체 됐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활동 재개할 가능성은 있나요?
아립: 멤버들하고 연락이 끊어진지는 오래 되었어요. 베이스를 쳤던 신지현 씨 하고만 연락하고요. 아마 다시 활동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Q: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약간이지만 아립 씨의 입으로 스웨터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좋네요.
아립: 그러니까요. 저도 고향집 이야기 듣는 것처럼 좋아요. 




Q: 그동안 자체 제작으로 앨범 작업을 해오다가 작년부터 레이블 일렉트릭 뮤즈와 함께 하게 되었어요. 다양한 인디 레이블 중에서도 왜 일렉트릭 뮤즈인가요? 또 혼자서 음악할 때와 다른 점이 있던가요?
아립: 이번 앨범 제목이 [망명(亡明)]인데 ‘빛이 사라지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저한테는 일렉트릭 뮤즈로 망명(亡命)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동안 혼자서 음악을 할 만큼은 했거든요. 홀로 앨범 전체 작업을 하다보니 제 틀 안에 갇히는 것 같았고 조언자가 필요했어요. 음악적으로 멋진 프로듀서도 필요했구요. 거기에 가장 걸맞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분이 일렉트릭 뮤즈의 김민규 씨였어요. 친분을 떠나서 그 분이 만들어내는 음악과 음반에 대한 이상, 가치관들이 저와 잘 맞았어요. 그러다보니 그곳에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일었어요.
이번에 [망명]을 만들면서 누군가와 함께 작업을 해보는 일은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었어요. 다른 뮤지션들은 시작부터 겪는 일일텐데… 저는 이제서야 처음 겪어서 되게 색다르고 신선했어요. 그 경험들이 너무 좋았구요. 앨범도 그렇지만 앨범이 나오기까지 많은 드라마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Q: 드라마라면 어떤 것인가요?
아립: 어떤 사건이 있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작업을 하는 동안 어떤 깨달음을 얻는 일이죠.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혼자서 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 깨닫는 것들일텐데’ 라며 혼자 생각하고. (웃음) 음악을 만들면서 홀로 모든 과정을 겪다보니 놓치고 있었던 수많은 지점들이 보이더라구요. 저로서는 되게 큰 것을 발견하게 된 거죠. 

Q: 이번 앨범에서 일렉트릭 뮤즈 식구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는 것 같아요. 작업은 재미있었나요?
아립: 네, 재미있었습니다. 그 분들이 있었기에 이번 앨범이 나오게 된거죠. 특히 프로듀서를 맡은 홍갑 씨는 제가 갖고 있는 음악에 마치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멜로디와 노래에 하나의 색을 입혔어요. 그것을 보면서 곡을 쓴 저보다도 훨씬 이 음악과 앨범에 대한 이해가 높다는 생각을 했어요. 역으로 되게 많이 배운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이것도 앞서 말한 드라마에 포함되는 일이었죠. 

Q: 앨범 [망명]은 1년간 쓰여진 곡들 중에 쓰고 지우면서 완성 되었다고 들었어요. 선정된 6곡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아립: 이전의 저의 솔로 앨범들의 경우, 먼저 노래를 만들고 나서 제목을 달았고 당시에 제가 느꼈던 느낌과 비슷한 맥락인 것들로만 묶었어요. 근데 이번에는 컨셉부터 정하고 노래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결정하고 나서 쓰기에 들어간 곡도 있었구요. 단초(端初)가 된 곡은 ‘계절이 두 번’이었어요.
이어서 앨범 컨셉은 이전까지의 이아립이 드러내지 않았던 어두운 면에 집중해서 만들어 보자는 쪽으로 잡았죠. 기쁨 보다는 슬픔, 상실, 사랑보다는 이별 쪽에 포커싱을 맞춰서 ‘다크사이드 오브 이아립’ 느낌으로 잡아보자. 해서 많은 노래들 중에 그런 느낌의 곡들만 고르게 되었죠. 

Q: [망명]은 요즘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앨범 같지가 않아요. 예전 싱어송라이터들의 음악 방식처럼 들렸는데 의도한 건가요?
아립: 제가 옛날 사람이어서 그런 것도 있을 거구요. 김민규 씨가 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잘 프로듀싱 하신 것 같아요. 애초부터 그런 올드한 느낌을 지향한 것도 있었어요. 그때의 노래들을 들으면서 레퍼런스로 삼은 것도 있구요. 요즘의 음악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쉽게 찾아서 들을 수 있고 언제든지 내가 원할 때 들을 수 있다는 거죠. 저는 이번 음반에는 그런 것을 담지는 않았어요. 그런 편리함과 가벼움과는 반대되는 느낌의 무거움이라든가, 진지하고 깊게 들어야만 할 것 같은 음악들을 하고 싶었어요. 

Q: 첫 곡 ‘1984’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동명 소설을 읽고 지금 현실에 빗대어 쓴 곡이라고 하는데 의미심장한 가사가 인상적인 곡이더군요. 곡이 끝나가면서 “우리가 뱉어버린 말의 악취가 여기 이 곳에 진동하네 음” 하고 말 끝을 흐리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아립: ‘1984’에서 “그래봤자 뭐해. 세상이 온통 지옥인데” 라는 가사가 나오는데요. 이 부분은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그런 말을 하는 누군가들이예요. 저는 그런 말이 너무 싫어요. 그렇게 말을 하면서 핵심을 흐리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고… 그에 빗대어 ‘1984’는 SNS상의 너무도 많은 말들에 대한 노래예요. 무수히 많은 검지들로 쓰여진 말들은 때로는 하나의 진실들을 가리죠.
곡의 마지막에는 ‘우리가 뱉어버린 그런 말들의 악취가 진동하는 이 시간’에 대한 노래를 합니다. 음,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사실은 그 악취를 경멸하지만 어느 순간 알게 모르게 똑같이 내뿜고 있을 거란 말이죠. 그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이아립의 5번째 앨범 [망명] 


Q: 앨범 [망명]의 시작이 된 곡 ‘계절이 두 번’에서 계절은 언제를 말하는 것인가요? 언제 쓰여졌는지도 궁금합니다.
아립: ‘계절이 두 번’은 진짜 물리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가을부터 쓰기 시작해서 겨울이 지나 봄에 완성이 된 거죠. 그 해 가을과 겨울에 대한 쓸쓸한 소회(所懷)를 담은 곡이예요. 

Q: 앨범에서 가장 밝지만 지난 추억을 곱씹는 듯한 느낌인 ‘그 사람’과 헤어졌던 연인의 새 애인에게 뼈가 있는 말을 하는 듯한 ‘조언’은 절묘하게 이어집니다. 이 두 곡들이 실제로도 이어지는 건지 궁금합니다.
아립: ‘그 사람’은 한참 전에 쓰여진 곡이예요. ‘조언’은 이번 앨범 작업하며 쓰여졌는데 묘하게 딱딱 붙어서 수록했습니다. 

Q: ‘원더랜드’는 아립 씨의 노래 중에서 드물게도 강한 단호함이 느껴지는 곡 같아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픔과 후회를 노래하는 것인가요?
아립: 후회는 아니고요. 살면서 그런 순간들이 있잖아요. 길에 서있는데 갑자기 다 무너져 내리는 듯한… 차라리 내 앞에 있는 모든 풍경들이 다 부서져 버렸으면 좋겠다. 그런 심정과 비장한 느낌으로 노래 녹음을 했어요. 이 곡을 녹음할 때 시간은 밤 시간이었구요. 일부러 가을과 겨울의 느낌으로 톤을 만들어서 녹음을 했어요. 

Q: 마지막 트랙 ‘끝’은 지난 시절과의 안타까운 작별 인사를 보내는 노래인 만큼 애절한 느낌이 듭니다. 그 다음 바로 첫 곡 ‘1984’와도 무척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요. 이때야 비로소 [망명] 앨범이 하나의 스토리텔링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앨범을 만들 때부터 의도한 것입니까?
아립: 저는 항상 끝과 처음은 연결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번 앨범 말고도 전작들을 만들었을 때도 끝과 처음을 연결시킨 지점이 있는데요. 앨범을 끝까지 듣고 처음부터 다시 들으시라는, 저만의 권유죠. 그래서 앨범 곡 배치를 그렇게 했어요. 

Q: 이번 앨범 가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바람, 세상, 시간, 계절, 사랑, 사람, 나인 것 같습니다. 원래 이 단어를 좋아하세요?
아립: 아마 다른 뮤지션들도 특정 단어들을 많이 쓸 거예요. 저도 새로운 것을 하려면 앞으로 단어 개발을 해야하는데. (웃음) 아무튼 제가 좋아하는 단어이긴 해요. 

Q: 앨범 제목이 굳이 망명(亡明)일 필요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풀어서 ‘빛이 사라지다’로 지었어도 될텐데 말이죠.
아립: 저한테는 이 망명이란 단어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막막하면서도 앞으로 살기 위해서 어디론가 가야한다는 절박함, 칼처럼 자신의 날을 세우고 싶었구요. 그런 단호한 감정이 있던 차에 눈에 들어왔죠. 예전에 망명한 이 시대, 망명한 이 밤, 같은 느낌의 단어 쓰임을 보며 되게 좋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아까도 말했지만 제가 계속 혼자서 작업하다가 일렉트릭 뮤즈로 갔으니까. 말 그대로 망명(亡命)이기도 하죠. 

Q: 앨범 소개에서 [망명]을 준비하며 ‘시간의 흔적에 대한 긍정을 이야기했다’고 했어요. 어떤 것이 긍정일까요?
아립: 주변 친구나 지인들이 이 앨범 나오고 나서 무슨 일 있었냐, 어려운 일 있었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어두운 분위기의 앨범이 나와서인지 그런 반응을 하더라고요. 근데 사실은 그 어떤 때보다 밝은 마음으로 작업을 했어요. 지금처럼 환할 때 불을 끄면 처음에는 안 보였다가 나중에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잖아요. ‘새로운 빛을 찾아가는 희망의 느낌… 어두울 때야 말로 어두운 것을 바로 직시해야만 정말로 빛을 찾거나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긍정들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Q: 3월 6일에 홍대 벨로주에서 있었던 단독 공연은 어땠나요?
아립: 공연 1주일 전부터 멘트 때 할 콘티를 짰어요. 이때는 무슨 말을 하고, 뭘 해야 하고, 또 붙이고… 근데 그러면서 “오늘 너무 긴장되네요”, “너무 떨려요” 같은 말을 넣은 거예요. 막상 그때는 안 그럴 수도 있는데도 멘트 때문에 정말로 그렇게 되버렸어요. 말이 씨가 된다는 말처럼요. 멘트를 만들면서 긴장하는 연습까지 해버린 거죠. 편안하게 유연하게 하고 싶었는데… 제가 제 스스로의 발을 건 것만 같은 느낌이라 그 점이 아쉬웠네요. (웃음) 그렇지만 즐거웠구요. 한 석달만에 하는 공연이었는데 오랜만에 해서 마치 처음 공연하는 것 같았어요. 1부와 2부를 나눠서 했는데 1부는 보컬과 기타 한대, 피아노 한대. 그렇게 제가 그동안 했던 느낌으로 진행했어요. 2부에서는 밴드셋으로 공연을 했는데요. 밴드를 했던 시절, 스웨터를 기억하게 하는 공연이었구요. 그래서 아주 남다른 느낌이었죠. 좋았어요. 




Q: 최근 공연에서 자주 부르는 ‘움트네, 봄’ 같은 곡은 앨범 [망명]이 끝나고 쓰여진 곡이라고 들었어요. 그런 곡이 더 있나요? 그 외 [망명]에 실리지 못한 곡들을 언젠가 다른 데서 들을 수 있을까요?
아립: 네, 그럼요. 그중에서 살아남고 생명이 있는 것들은 언젠가 새로운 색을 입고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움트네, 봄’의 경우는 다른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될 예정이라 녹음까지 마쳐서 곧 음원으로도 나올 거구요. 봄을 노래하니까 요즘 듣기에 잘 어울릴 거예요. [망명]에 수록된 곡들이 깜깜한 사진이라면 ‘움트네, 봄’은 희망적인 빛을 노래한… 그 다음 사진을 그려볼 수 있는 곡으로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앨범 공연 할 때 자주 끼워 넣어서 불렀던 것 같아요. (*[숨 (SUM∞) 여섯 번째 그린플러그드 공식 옴니버스 앨범]에 수록) 

Q: 아립 씨는 그동안 굉장히 많은 공연을 하셨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을까요?
아립: 사실 저는 항상 다음 무대만 생각해요. 가장 좋은 공연은 끝나고 나서도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공연이예요. 공연 때는 언제나 최선을 다 하고 기분 좋게 끝내야 하죠. 그럴 때는 늘 깔끔하게 아무 생각이 안 나고 금방 다 잊어 먹어요. 근데 공연이 끝났는데도 뭐가 막 떠올라… 그러면 저는 밤에 누워서 진짜 이불킥하고 잠 못 자거든요. (웃음) 저한테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 공연이예요. 그게 한달 후든 바로 내일이든, 저한테 있어 가장 중요하구요. 그래서 항상 다음 공연을 제일 기대하면서 공연 준비를 해요. 

Q: 이아립의 음악하면 사람들이 자연, 여행, 휴식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의식하고 음악을 만들어요?
아립: 저 자체가 나이브하고 나른하고 루즈해서 그런게 있나 봐요. 제 음악을 들으면 회사 때려치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뒷일을 부탁해’처럼 뭘 그렇게 아둥바둥 살아 뭐가 이렇게 중요하니, 이러면서. 제가 약간 부추기는 것 같긴 해요. 제가 가진 어떤 느낌인 거겠죠. 

Q: 여행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갑자기 여행을 간다면 어디로 가고 싶습니까?
아립: 지금 당장이라면 일단 제주도에 갈 거예요. 꽃이 많이 피었을 것 같아요. 유채꽃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벚꽃은 좋아하거든요. 벚꽃 보러 가고 싶어요. 또 제주도는 바람도 너무 좋잖아요. 근데 여행은 누구랑 가느냐가 제일 중요한데… 그렇죠? 사실은 지금 그렇게 여행 갈 마음은 없어요. 왜냐하면 봄이 잖아요, 지천에 연두색 잎이고, 꽃이니까요. ‘됐다. 더이상 여행 갈 필요가 없겠다.’ 이 생각이 딱 들었어요. 

Q: 지난 솔로 앨범 네 장은 개인 레이블인 열두폭 병풍에서 나왔습니다. 한때 독립적으로 앨범 제작과 유통 등 모든 것을 해결해보고자 했다고 들었는데요.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요?
아립: 저 혼자 노래를 만들고 녹음을 하고 앨범까지 만들어서 유통까지 딱 하는 것. 그것이 가장 독립적으로 음악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회사에 들어가서 앨범 작업이든 무언가를 하게 되면 결국에는 분업을 하지만, 저 혼자서는 분업이 안되니까 그 모든 과정을 혼자 겪을 수 있게 되는거죠. 음악의 전 과정을 다 해보고 싶었어요.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팔고, 팔 때는 “저는 이걸 만원에 팔겠습니다. 그러니 얼마를 주십시요” 하는 딜도 하구요. 그런 과정을 다 알아보고 싶었어요. 뭐… 이젠 지긋지긋 하죠. 알만큼 충분히 알았어요. (웃음) 




Q: SNS와 이메일 주소에 ‘foreveryoungforeverblue’란 단어가 눈에 띕니다. ‘열두폭 병풍’의 의미도 궁금하고요. 또 열두폭병풍의 홈페이지 주소에서는 ‘sugarpaper’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들이 다 무슨 뜻인가요?
아립: 제가 어렸을 때는 페이퍼, 그러니까 잡지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거든요. 나중에 독립잡지 <싱클레어>를 만들긴 했지만… 아무튼 페이퍼에 관심이 꽂혀 있었을 때 sugarpaper라는 도메인을 샀을 뿐이고요. 지금은 단지 열두폭 병풍의 도메인명일 뿐이예요. 열두폭 병풍은 개인의 그림과 이미지와 멜로디 같은 여러가지 것들을 채워보자는 의미로 만들었어요. 사실은 저 말고도 다른 사람의 병풍도 함께 채워 넣고 싶은데 제가 살기 바쁘다보니 그럴 여유가 없네요. 그래도 한폭 한폭 채워가는 느낌으로 나중에 그 열두폭을 완성하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그리고 foreveryoungforeverblue는 제가 음악을 시작하게 된 동기 중 하나가 리버 피닉스(River Phoenix)라는 영화배우 때문인데 그 배우를 보면서 느낀 문장이예요. 리버 피닉스는 20대의 모습으로 영원히 늙지도 않고 박제가 되었잖아요. 저는 젊음은 푸른빛이고 청춘은 푸른빛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젊고 푸른빛 안에 갖힌 영원함. 그런 뜻으로 지었어요. 

Q: 열두폭 병풍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이야기는 여기서 나눠요’라는 글과 함께 이메일 주소가 전부더군요. 그곳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나요?
아립: 홈페이지는 지금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곳 이메일 주소로 저에게 말을 걸어 주시면 제가 답변해 드려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십니까’ 처럼. (웃음) 그렇지만 정말 불편한 방식이죠. 메일을 쓰는 것은 정말 귀찮은 일이고 메시지도 아니잖아요. 사실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라기 보다는 그냥 홈페이지를 닫아 놓고 싶었던 시간이 있었어요. 때마침 라디오 디제이를 하다보니 하루에 할말을 전부 소진하는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그냥 홈페이지를 닫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졌어요. 그래도 다른 세상에 말 거는 느낌으로 들어오시면 성실하게 대답해 드립니다. (웃음) 

Q: 과거에 아이폰을 자주 활용하고 녹음하면서 음악을 만든다고 언급하셨어요. [세번째 병풍 – 공기로 만든 노래] 마지막 트랙 ‘패턴놀이’에서는 라이브 느낌을 주고자 아이폰으로 녹음한 음원을 덧입혔다고 들었어요.
아립: 네, 3집의 첫번째 곡 ‘흘러가길’도 걸으면서 나는 발걸음 소리에 맞춰 노래한 것을 녹음했었어요. 그때는 아이폰을 쓰니까 그런 활용들을 많이 했었고요. 이전에는 ‘음반을 굳이 주얼케이스에 넣어야 해?’, ‘음악을 왜 스튜디오에서만 녹음을 해야해?’ 그런 생각들을 해서 그런지 여러 시도들을 했어요. 음반을 시디 케이스가 아닌 테두리에 담아서 실로 엮어 만들기도 하고 했었고… 그런데 저를 소비하시는 분들은 제 음악을 들으시는 분들이더라고요. 그즈음부터 여러가지 작업들을 하면 할 수록 최대한 음반에 충실할 수 있는 앨범을 만들고자 했구요. 이번 [망명] 앨범 때 부터는 정말 음반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했어요. 이전 앨범에서 많이 쓰였던 잡음 같은 요소는 최대한 배재하고서 정말 음악만 집중하며 들을 수 있는 앨범을 만들었죠. 그것을 일렉트릭 뮤즈에게서 많이 배웠어요. 


대림미술관 D PASS 인디 콘서트 중 ©Jongkyu Kim 


Q: 이아립 씨의 가사는 특별한 것 같아요. 가사는 어떻게 쓰나요? 책을 많이 읽으실 것 같아요.
아립: 책을 좋아하고 읽는 것도 진짜 좋아해요. 근데 그게 전부 제 가사로 오는 것 같지는 않아요.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연두색으로 각종 기호들이 막 흐르잖아요. 저는 사람 안에도 그런 문장이나 느낌 같은 것들이 계속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무언가를 보고 느낄 때나 경험에서 우러나오거나, 아니면 갑자기 발현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게 어떤 문장들이 흐르는 느낌을 받으면 캐치해서 가사를 써요. 저는 멜로디를 먼저 쓰고 가사를 쓰는 스타일이 아니라, 우선 어떤 심상과 문장이 있어야 노래를 쓸 수 있어요. 아니면 노래랑 문장이 같이 나오거나. 그렇기 때문에 저한테는 가사가 먼저예요. 그래서 제 멜로디는 그렇게 화려한 것 같진 않습니다.
그렇게 쓰여진 가사를 읽어보면 문장 자체에 큰 울림이 느껴지는 문장이 많은데 제가 봐도 신기할 때가 자주 있어요. 또, 이런 경우도 있었어요. 노래를 쓰는데 그 노래가 지금의 저보다 앞서 가는 거죠. 노래가 무슨 언령(言霊)이 되는 것처럼… 한 6개월 후의 일들을 미리 예언해주는 노래들이 있었어요. 생각이나 느낌들이… 그럴 때면 진짜 신기하죠. 

Q: 영화 <어머니>의 OST라든가, [이야기해주세요-두번째 노래들] 앨범에도 참여하셨어요. 두드러지진 않지만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 그런 노래를 더 들어볼 수 있을까요?
아립: 관심이 없을 수가 없죠. ‘1984’ 같은 곡은 저의 가장 개인적이면서 가장 사회적인 곡이죠. 제가 보기에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앞으로 더 급속하게 안 좋아질 것 같은데, 음… 모르겠어요. 저는 처음부터 어떤 의도나 계획을 갖고 곡 작업을 하진 않아요. 제가 생각해서 만든 노래가 그런 흐름의 틀에 맞았던 거겠죠. 

Q: 최근 새 앨범을 낸 이호석 씨와 공연을 자주 하시더군요. 함께 하와이로 활동을 해서 그런지 두 분의 음악적인 느낌이 닮은 것 같아요. 그러고보면 아립 씨의 주변 친한 음악인들은 음악적인 느낌이 조금씩 비슷한 것 같네요.
아립: 아, 그래요? 그렇다면 제가 사람을 잘 본 거겠죠. (웃음) 아마 그들과 제가 비슷한 결이 있다면, 하나겠죠. 목소리가 별로 크지 않고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제가 실제로 물리적인 큰 소리를 힘들어 하거든요. 호석 씨 같은 경우에는 팀을 같이 할 생각은 없었는데 공연하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다, 쟤랑 팀을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잘 알아본 거죠. (웃음) 

Q: 최근에 눈여겨보는 음악인이 있어요? 새로 같이 음악 작업을 하고 싶은 사람은요?
아립: 사는 것에 급급해 하지만 인디 음악은 많이 들어요. 지금 음악은 정말 다양해졌어요. 제가 꼽을 수 없을 만큼 좋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근데 그중에서도 제일 부동의 1위를 차지 하시는 분은 김목인 씨예요. 바꾸고 싶긴 한데. (웃음) 그리고 제 앨범의 프로듀서였고 이번에 새 앨범을 낸… 신흥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홍갑 씨가 있네요. 정말 독특한 미성과 재미있는 생각을 가진 귀여운 친구인데. 음악은 또 되게 시원시원해서 반전의 매력이 있어요. 

Q: 이번 [망명] 앨범을 어머니에게 들려 드렸더니 너무 어두운 음악이라고 하셨다면서요. 오랫동안 음악을 하면서 가족에게서도 영감과 도움을 많이 받았을 것 같아요. ‘엄마’, ‘베로니카’ 같은 곡도 있고.
아립: “음악인이라면 좀 희망적인 것을 노래해야하지 않겠니?” 라고 하셨죠. 나도 그러고 싶어요, 엄마. 잘 될 거야 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웃음) 관계에서 느끼는 것들과 경험에서 느끼는 것들, 그 경험들이 바탕이 돼서 어떤 사유가 나오고 문장이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것에서 오는 울림이 크죠. 그런 애정을 갖고 있는 관계들이 더 울림이 크다고 생각하고요. 가족은 저의 일부이기도 하니까. 

Q: 아립 씨의 곡 중에는 사랑 노래가 많아요.
아립: 어떻게 보면 다 사랑 노래인 것 같아요. 이번 [망명]도 그 사람에게서 이 사람으로 넘어가는 지난한 과정이랄까. ‘끝’은 “이 사람 손 잡아요” 하고 끝나잖아요. 항상 노래가 그런 식으로 가는 것 같아요. 




Q: 그러면 본인이 생각하기에 연애를 할 때와 안 할 때 중 언제가 음악이 더 잘 되나요?
아립: 그것은 그때 그때 다른 것 같아요. 음악을 하는 사람들한테는 뮤즈가 되는 사람들이 있죠. 그 뮤즈가 연인인 사람도 있고 헤어진 인연인 경우도 있어요. 근데 연인인데 뮤즈가 되어 주지 않는 사람도 있죠. 

Q: 솔로로는 거의 포크 계열의 음악을 하는데 다른 장르에 도전할 생각은 있습니까? 가령 전자음악이라든가.
아립: 뿅뿅 사운드의 음악은 [두번째 병풍 – 누군가 피워놓은 모닥불]에서 시도해보았어요. 저는 디스코 음악도 좀 좋아합니다. 근데 해보고는 싶지만 그렇게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네요. 그래도 보사노바는 꼭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이아립의 음악을 해보고 싶습니다. 

Q: 아립 씨의 지난 인터뷰들을 보니까 특별히 좋아하는 뮤지션을 언급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지금도 그러한가요?
아립: 사실 제가 그렇게까지 음악을 많이 듣는 편은 아니예요. 다른 뮤지션들에 비하면 음악을 많이 알지는 못하고요. 대개 음악을 들으면 이 음악에서 저 음악으로 링크를 걸듯이 듣잖아요. 발라드를 듣고 있다가 신나는 곡이 듣고 싶으면 댄스를 듣고, 그 다음에는 록을 듣는다는 식으로요. 저는 그러다 가장 마지막에 듣는 음악이 보사노바거든요. 조앙 질베르토(João Gilberto),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 쪽 음악이예요. 이 음악들을 들으면 저는 다른 음악을 들을 필요가 없어요. 다른 링크를 걸 필요가 없는거죠. 몇 년 동안 제일 많이 들었어요.
저한테는 보사노바가 그야말로 집 같은 느낌인데 언젠가 호호할매가 되면 그런 음반을 내보고 싶어요. 햇볕이 촥 내려쬘 정도로 쎈 여름에 나른하게 퍼져 있어도 괜찮은 그런 느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고 안에서만 느껴지는 삶의 치열함… 근데 듣기에는 되게 온유하고 편안하게 들리죠. 그 화성들이 정말 어마어마 하거든요. 다른 음악으로 굳이 갈 필요 없고 질림 없이 듣게 되는 음악인 것 같아요. 그만큼 보사노바를 좋아해요. 

Q: 작년에 했던 라디오 디제이 활동은 어땠어요?
아립: 그전에도 심야 라디오 방송 목소리 같다는 말을 진짜 많이 들었어요. 작년에 라디오 디제이를 하게 되면서 ‘드디어 내 자리를 찾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근데 제가 말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서 두 시간 내내 끊임 없이 말을 해야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더군요. 그래도 그 시간에 제 이야기를 들으러 오시고 말을 걸어주시는 사람들이 있어서 훈훈하게 보낼 수 있었어요. 서로 안부를 물으며 “오늘 콩나물 반찬에 뭐 먹었어요”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요. 꿈 같은 시간이었죠. 

Q: 책이나 영화를 많이 보실텐데 최근 본 것 중에서 추천할 만한 것들이 있나요?
아립: 영화는 <캐롤>을 너무 재미있게 봤구요. 책은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이란 책인데 페소아는 <페소아의 페소아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명(異名)으로 활동한 작가예요. 이름마다 완벽한 캐릭터를 만들어서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떤 영향 아래 어떤 유년기 시절을 보냈으며 어떤 직업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를 만들어 낸 것으로 유명하지요. 아무 생각없이 이 책을 펼쳤는데 친구를 만난 것만 같았죠. 때로는 저 자신과 이야기하듯, 내 마음을 너무 잘 알아주는 것이 마치 소통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투명사회>도 추천합니다. 저자인 한병철 씨의 통찰력에는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Q: 오래된 독립잡지 중 하나인 <싱클레어>에서 디자이너로 참여했다고 들었어요. 여전히 참여하나요?
아립: 지금은 손을 놓은 상태고요. 시작에 있어서는 같이 했었죠. 그때는 지금처럼 독립잡지라는 명칭이 쓰이지 않을 때였으니 <싱클레어>가 거의 처음이었죠. 비교적 최근에야 독립잡지가 주목을 받는 경향이 생긴 거구요. <싱클레어>에서 디자인적인 시도는 다 시도해본 것 같아요. 

Q: 뮤지션이지만 생계를 위해서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고 들었어요. 지금도 디자인을 하나요?
아립: 디자인을 안 한지는 오래 되었어요. 마지막으로 디자인을 한게 4집 [이 밤, 우리들의 긴 여행이 시작되었네] 앨범이었던 것 같은데. 딱히 디자인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는 앨범이예요. 어느 순간부터 디자인이 없는 디자인이 좋아졌어요. 자기 자리에서 심플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이 마음을 끌었죠. 그렇게 디자인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디자인을 안하게 되었어요. 이제 저는 온전한 음악인이네요. (웃음) 

Q: 오래 음악인으로서 살았는데 한국에서 음악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립: 외국에서는 활동을 안 해봐서 비교할 수는 없네요. 그래야 장점과 단점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웃음) 근데 음악을 한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음악이란 것은 사실 없어도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장소가 한국이라거나, 지금 시대라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예요. 제 말은 음악이 없다고 사람들이 죽는 것은 아니잖아요.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일종의 우리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죠. 그 때문에 음악을 한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보고요. 




Q: 음악 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신촌과 홍대의 음악 관련 장소들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아립 씨도 이런 상황을 안타까워할 사람 중 하나 같은데요.
아립: 네, 맞아요. 그 중에서도 향음악사가 없어졌다는 것은 그 변화하는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음악시장이 어렵기도 하지만 이제는 음악을 소비하는 시스템도 완전히 바뀐 거죠. 지금은 사람들이 음악을 잘 듣지 않고 그저 클릭 하나를 소비할 뿐이죠. 예전처럼 실제로 찾아 듣는 경우는 매우 드물게 되었잖아요. 쉼없이 변화하는 시스템과 산업을 통해서 언젠가 완전히 사어(死語)가 되어 버리는 것도 생기겠죠. 카세트 테이프며 CD며 음반사며… 

Q: 음악을 하면서 가장 행복했을 때와 가장 힘들었을 때가 있었나요?
아립: 저는 기타 소리를 되게 좋아하거든요. 피아노 소리도 좋아하지만 기타 줄이 띵- 하고 울릴 때… 그 선명한 울림처럼 조금의 미련도 아쉬움도 없는 공연을 할 때 행복을 느끼고, 그 순간을 사람들과 나눴을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욕심을 부릴 때 힘들어져요. 

Q: 뮤지션 이아립으로서 언젠가 서보고 싶은 무대가 있다면? 
아립: 말도 마요. 많죠. 일단 제일 가까운 데서 해보고 싶어요. 저의 집 앞이 마포 아트센터에요. 진짜 코앞이거든요. (웃음) 또 저의 집 근처에는 서강대도 있는데 거기에 메리홀이 있으니까 거기서도 해보고 싶어요. 그렇게 가까운 데서부터 하나씩 점령해 나가고 싶어요. 

Q: 만약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 것 같은가요? 
아립: 음, 저는 내일도 음악을 안 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아마 음악 안 했으면 어부가 됐을 거예요. 저 어렸을 때부터 꿈이 어부였어요.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지금이라도 할 수 있을까요? (웃음) 

Q: 지난 시절 다양한 매체와 인터뷰를 해왔어요. 언젠가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도 했는데 지금은 어때요?
아립: 네, 그랬어요. 왜냐하면 저는 얘기하는 순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가 되거든요. 저의 생각이나 감정, 심지어 제가 정의내리는 것들까지도요. 음악을 하고 행복한 순간 조차도 계속 변해요. 인터뷰를 하는 것은 어딘가에 글로 남는 거잖아요. 사람들은 그것으로 나를 기억할 것이고요. 그래서 저는 제가 한 말들이 항상 두렵습니다. 

Q: 10년 후에는 어떻게 될 것 같은가요?
아립: 전혀 모르겠네요. 살아 있을까? 우리 다 같이 살아 있을까? (웃음) 과연 살아 있다면, 모르겠어요.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심심하지 않게 주변 사람들과 즐겁게 뭔가를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네요. 

Q: 앞으로의 활동은 어떻게 되나요?
아립: [망명]이란 앨범을 냈으니까 불러주시는 곳에서 공연을 할 거고요. 앨범과 관련된 모든 활동은 진짜 잘 할 거예요. 이번 앨범이 이아립의 다음 앨범을 기대하게 만드는 작업이었으면 좋겠고요. 앞으로 공연을 계속 하고 새 음반도 만들어야죠. 

Q: 2016년 현재의 이아립의 음악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립: 저는 사실 ‘1984’를 알람송으로 하고 사는데 아침에 “흔들리는 건…”하는 가사를 들으면서 깨면 진짜 정신이 번쩍 나거든요. 아침부터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노래하다니 서늘하잖아요. 근데 그냥 시끄럽다 이런게 아니라, 정신과 온몸의 세포들이 번쩍하면서 깨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 당신을 깨우는 목소리였으면 좋겠네요. 누구보다 작고, 다른 가창력 있는 가수처럼은 못 부르지만. 작지만 당신을 깨우는 목소리였으면 좋겠네요. 


이아립 (Earip) 

열두폭 병풍 

2016년 3월 10일 목요일

[Interview] ASPIDISTRAFLY (ENG) - 2016-03-10

ASPIDISTRAFLY: An Ambient Folk with Warm, Dreamy, and Delicate Harmony BY 김종규 - 2016-03-10

*Original link: http://webzinem.co.kr/3587


ASPIDISTRAFLY ©KITCHEN. LABEL 


‘ASPIDISTRAFLY’ is a Singaporean duo band that consisted of April Lee(composer/vocalist) and Ricks Ang(producer). They deliver a familiar but dim feeling by creating the impression of space with a variety of instruments and electronic sound. 

Since their debut EP [The Ghost of Things] in 2004, they have released the first full-length album [i hold a wish for you] in 2008 and the 2nd album [A LITTLE FABLE] in 2011. They are currently receiving the global spotlight over Asia including Japan. In 2008, Ricks Ang of ASPIDISTRAFLY formed his own label, ‘Kitchen. Label’ which is based on Singapore and Tokyo and has released various music records. Also, he is doing a wide variety of musical activities by discovering the most talented young artists and planning collaboration works. 

Last year, ASPIDISTRAFLY had a concert in the bookshop, YOUR-MIND located in Hongdae on Septamber 2. It was a mini concert but the audience totally fell into their music with a long lasting impression. This interview was conducted by e-mail later in February. 




Q: What is the meaning of ‘ASPIDISTRAFLY’? How did you come up with the name?
April: ASPIDISTRAFLY is a wordplay on the novel by George Orwell “Keep The Aspidistra Flying”. The book had a considerable influence on my childhood when i was just beginning to understand art, music, society and politics. Having said so, our music has no direct relation to the contents of the novel, but we wanted a name that sounded and looked unique.
Ricks: April mentioned the book to me when we were thinking of a band name. I decided to put the words Aspidistra and Fly together and that was it. It was probably one of the easiest decisions we ever made. 

Q: April and Ricks formed a duo ASPIDISTRAFLY in 2002. How did you guys meet for the first time and decided to play together?
April: We met through mutual friends and actually before ASPIDISTRAFLY we played in a shoegaze band together. Back then, Ricks was the drummer and band leader while i was the vocalist/guitarist.
Ricks: That band split up when the other two members left in 2001. We decided to continue doing music together as a duo. We didn’t know what to expect as there can be many unknowns in the creative process but our intentions aligned and we wanted to create something together. 

Q: What inspires you to make music? What message do you try to put in a song?
April: I think inspiration can come from everywhere – it could be something hazy from a distant childhood memory. Sometimes you can’t put real words to an emotion and it becomes melody and lyrics.
Ricks: For [A Little Fable] at least, we were inspired by films like ‘Valerie and Her Week of Wonders’ and ‘The Seventh Seal’; and also our excursions into the outer reaches of Japan. 

Q: Who is your favorite or most influential artist?
April: Serge Lutens and Salvador Dali.
Ricks: The music and art of ECM. 

Q: I like your songs, especially ‘Moonlight Shadow’, ‘Endless Dreamless’, ‘Landscape With a Fairy’. It seems that you like to sing the boundaries between daily life landscapes and illusionary images. I mainly listen to your music when I can’t sleep at dawn. I wonder if it’s intended.
April: I recorded my vocals and guitars in the witching hours when everyone was asleep so i guess listeners like yourself can somehow feel it :)
Ricks: I’d take these recordings by April and start building textures around them bit by bit. Kind of like a sound painting and it is very important for me to respect the characteristic of her lyrics so as to shape these songs into our very own sound world. 

Q: What is your favorite tune among your own music?
April: ‘Twinkling Fall’ from [A Little Fable]. It was written free of any complications from the world that adults live in and is the most childlike song I’ve ever composed.
Ricks: ‘Sea of Glass’ from [A Little Fable]. I am a perfectionist and this is a one track that is the most perfect to me. 


ASPIDISTRAFLY is (left to right) – Ricks Ang(producer) and April Lee(composer/vocalist). They played at YOUR-MIND in Seoul last year. ©Jongkyu Kim 


Q: Let’s talk about your concert at YOUR-MIND in Seoul last year. It was an unexpected surprise! How did it come to you?
Ricks: We were actually in Seoul for a holiday and I mentioned it to Iro (YOUR-MIND store owner) before we came. I think it was a missed opportunity that we did not perform at the store in 2013 when we performed at Unlimited Edition. Iro and us wanted to make it happen despite the fact that it is a very small show. April: We’re deeply grateful to the owners of YOUR-MIND for their enthusiasm in sharing our vision among their community. 

Q: It was good to hear new songs like ‘The Voice of the Flowers’, ‘Altar of the Dreams’ and old songs together in that concert. The show was special for me like ‘A Midsummer Night’s Dream’. How was the show in Seoul for you guys?
April: It was a very intimate affair and i think YOUR-MIND was the perfect venue for us. Seoul is an amazing city… the energy and youth culture continues to blow us away.
Ricks: After the show, we went to Hongdae for Korean Fried Chicken and walked up and down the street. We also witnessed a fight at one of the clubs. We love the contrast. 

Q: I heard that you like K-POP. Do you have favorite Korean musician? Any artist you want to work with?
April: Hell yeah. I would love for Zico to collaborate on a track someday. Or sing in a Zion T track!
Ricks: I’d love to produce a duet between Oh Hyuk and April. If there is a chance, I’d be happy to have a chat with Tablo of HIGHGRND. 

Q: Listening to your music, I feel that it is affected by various genres like Shoegazing, fork, ambient and etc. These are flowing organically in your music. Did you intend that from the beginning?
April: It’s not our style to be deliberately influenced by specific genres. We don’t like to be categorised… we just do what we want to do and naturally it comes out that way.
Ricks: When I first started making music, I was very interested in creating droning guitar monoliths inspired by the experiments of Andrew Chalk and Phil Niblock. Then later, I delved into techniques of making music with the laptop and sampler where I built my own collection of manipulated natural sounds and sound samples from films. The textural element is always ever present in our songs probably due to my music making approaches. However we never wanted to follow standards in shoegaze, folk or ambient because the result of our tracks is usually a sum of our many influences combined. 

Q: I wonder indie music scene in Singapore. Please tell us about it.
Ricks: In Singapore, most artistic endeavour is necessarily government funded. In music, the musicians rarely follow a line of work within a label and they exist generally as live acts. To begin with, we do not even have an established pop scene like Korea does in K-POP. The most cliche answer is that our country is too small and too multi-cultured. Most musicians still have to venture outside of Singapore to find success. 

Q: You have established Singapore-Tokyo based KITCHEN. LABEL. How did you start with it?
Ricks: Music and design are the most important things in my life. The two are always linked. So I started the label initially in 2004 as an imprint to release and design our own albums. The idea wasn’t to make it a full fledge music label at first but to develop it into a design studio as I spent my time designing for clients and working on things like art direction for other musicians, art projects and festivals etc.
When ASPIDISTRAFLY toured Japan for the first time in 2007, I met a few like-minded Japanese artists like haruka nakamura, FJORDNE and ironomi . I felt that there was a momentum building behind this set of new artists who are doing something completely different with a brand new sound that perhaps happen once every 5-10 years. I believed that we were at that special moment with these artists at that time and that was when I decided to start the label.
As a matter of logistics, distribution is the starting point and I managed to secure a deal with p*dis in Japan. I would produce and manufacture our releases in Singapore and p*dis handle distribution to stores as well as pre-sales and promotion in Japan. The interest for our label grew from within Japan to the rest of the world through this way. Thanks to them, our releases can be found in record shops and online stores with a continual presence. The relationship with p*dis and our artists goes beyond a working relationship. They are also good friends and play a fundamental role in KITCHEN. LABEL.


ASPIDISTRAFLY’s 2nd album [A LITTLE FABLE] ©KITCHEN. LABEL


Q: Except for ASPIDISTRAFLY, is there any musician in your label that you want to introduce to Korean music fans?
Ricks: I managed to catch the exhibition “Think of your ears as eyes” by ECM in Seoul and was surprised that the label is well-liked by Korean music listeners. One of our artists haruka nakamura might pique the interest of Keith Jarett and Jan Garberek fans. For listeners who are curious in what music sounds like in Singapore, our other Singapore artist Hanging Up The Moon is a good representation of that with their local-centric themes and lyrics. 

Q: What is your future goal as a musician?
April: I just want to keep exploring the notion of sound, in any form. It can even be an ugly ’90s hihat sample. I want to make it cool and sing over it.
Ricks: The goal has always been the same, that is to produce a kind of music that only ASPIDISTRAFLY could do. 

Q: How would you describe your life in 10 years?
April: My life 10 years ago was very different, so i can’t predict what will happen in the next decade. I think i would just like to happy, whatever that may entail.
Ricks: I am pretty contented to be able to do what I love as a day job. In the next 10 years, I would love to see it bring me to more countries. 

Q: Please tell us how you are getting along.
April: Our schedule is pretty crazy but life is going great! Apart from making music for ASPIDISTRAFLY late in the night, in the day i’m an creative director and my work mainly revolves around direction for fashion editorials and creative strategies.
Ricks: As I have mentioned earlier, I manage KITCHEN. LABEL on my own. Currently, I’m working with my artists haruka nakamura, Hior Chronik and FJORDNE on future releases. Recently, I have also signed a new female singer-songwriter from Singapore. In March, I’m working with the people from Piano Day and p*dis on a show in Tokyo. And then this May, I will be organising a label concert featuring haruka nakamura PIANO ENSEMBLE and ASPIDISTRAFLY to be held in Singapore. In the midst of all that is happening, I’m also recording and mixing ASPIDISTRAFLY’s next album. 

Q: I would like to know more about your new album. Would you tell us about the new album briefly?
April: It’s probably going to very different from [A Little Fable]. We’re exploring instruments that we’ve never before explored, and it’s going to get a lot darker…
Ricks: As with all our previous albums, it’s going to be different. It bores us if we had to repeat doing the same things all over. 

Q: Is there any plan to play in Korea in the near future? I would like to see your concert in the bigger venue than the previous one, so more people can come over.
April: Me too! I want to play at Gayo Daejun alongside Zico.
Ricks: We’ll definitely make Korea a stop for our next album promotions. 

Q: Is there anything you want to say to your fans and Korean readers?
April: NOMU NOMU SARANGHAE!
Ricks: *making a heart shape with his two fingers.



ASPIDISTRAFLY 
Official Homepage: http://www.aspidistrafly.com/ 

KITCHEN. LABEL 
Official Homepage: http://www.kitchen-label.com